해방된 별 28
두 사람은 우키요에 마을 1번가를 걸었다.
"활기가 넘치는구나."
"먹고 마시고 담소를 즐기며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 건 인간이나 요물이나 매한가지니까. 이거 괜찮을 듯."
거리를 걸어가며 밖에 펼쳐져 있는 머리끈이나 머리핀 등의 악세사리를 호시는 살펴보았다.
"누가 할 건데? 너가?"
"아니. 시호가 해야지. 내 머리는 이제 짧잖아."
"평생 기를 것처럼 굴더니. 잘라버렸네."
"……그러게 말이야."
"소원을 담은 게 아니었어?"
"소원은 이뤄어졌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시호는? 언제까지 기를 건데."
"나도 내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시호."
호시가 시호를 불렀다.
"소원이 이뤄지고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다면 그 자른 머리카락 나에게 주지 않을래?"
"변태."
"부적으로 삼으려는 것이거든! 변태 아니야!"
시호의 말에 버럭 외쳤다. 왜 변태라는 소릴 들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
"남의 머리카락은 왜 가지고 있겠다는 거야?"
"부적으로 삼는다니까."
"그럴 필요가 있어?"
"시호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면 너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을 것 같은데."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런 부적에 의지하지 않아도."
"……그래도, 난 필요한데."
"알겠어. 소원 성취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면 그거 너 줄게."
"진짜? 약속하는 거야."
호시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시호는 호시의 손가락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듯이 픽 웃음을 터트리고 자신의 새끼 손가락을 그녀의 새끼 손가락에 걸고, 약속했다.
"호시는 어리구나."
"내가 언니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네, 너. 내가 먼저 태어났다구."
계산을 끝낸 호시는 입을 삐죽이며 빠른 걸음을 옮겼다.
"아, 기다려, 호시!"
시호는 호시가 뭘 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저녁 시간까지 우키요에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슬슬 출출하지 않아?"
벌써 저녁 때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이 아닐까…….
"아, 그러네."
"그럼 마지막으로 바케네코야로 가자."
"바케네코? 고양이 요괴?"
"응. 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인데, 맛있고……."
바케네코야로 들어가자 고양이 요괴들이 손님을 반겼다.
"어서옵쇼!"
"짐을 들어주겠습니다."
"어……."
"그럼 부탁할게."
어리둥절한 시호와 달리 호시는 익숙하게 똑같은 두건을 머리에 쓴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았다.
"료타네코는? 쿄코도 보이지 않네."
"당주님은 간부님들이 오셔서 그쪽을 안내하러 가셨습니다."
"누님은 도박장에 계세요."
"형님에게 안내해드릴까요?"
"아니, 손님이 있으니까."
방을 안내받고 종업원들은 음식을 가지고 왔다(술은 마실 사람이 없었기에 도로 보냈다).
"요괴가 만든 거라서 기대했는데……. 음식은 인간이 먹는 거랑 별 차이가 없네."
잔뜩 실망한 시호에 당혹스러워졌다. 그럼 대체 어떤 음식이 나오길 기대했던 거니?
"내가 그런 데로 너를 안내할 리가 없잖아!"
"도박장이라고 들었는데, 여기."
"……."
시호는 가고 싶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고 싶어?"
"조금…… 흥미가 있어. 인간 세계에서는 지금의 나이는 어른 취급하지 않잖아. 요괴로는 이미 성년인데."
"그럼 올라가보자."
"에? 진짜? 진짜 올라가도 되는 거야?"
"단, 구경만 하는 거야."
"응!"
시호의 먹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근데 갑자기 왜 수락한 거야? 반드시 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으면 들을 생각은 있고?"
"없지만……."
"시호가 원하니까 막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단지 그것뿐이야."
"내가 시코쿠 가서도 계속 요괴들과 어울린다고 해도?"
시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호시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호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그러던지."
"에?"
"그렇게 해. 성인인 너를 내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을 끝으로 호시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진짜로, 나, 어울려도 돼?"
"대신 옷을 짓워줄테니까 꼭 입고 다녀."
그 옷이 너를 보호해줄 테니까. 누구도 너를 상처입히지 않게 지켜줄 호신부의 옷을 만들테니까…….
식사를 끝내고 상층부로 올라갔다.
소란스러운 취객들의 목소리와 뚝 떨어진 건물의 상층부. 긴 복도를 지나면, 장지문을 없애고 방 두개를 잇댄 공간이 나온다.
오늘 밤 펼쳐진 건 정반도박이었다. 다다미에 흰 천을 깐 도박판이 있고, 그 주위에 도박을 좋아하는 요괴들이 둘러안장 짝이냐 홀이냐를 두고 나무패를 던진다. 진행자가 주사위가 든 종지를 흔들고, 엎은 종지를 들어 주사위의 수의 합이 짝인지 홀인지 밝힌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자, 쯧쯧 혀를 찬 자 등 승패가 갈리고 도박판 위로 패가 오간다.
'조용한 열기와 어두운 환희가 아우러진 바케네코야의 본업인데…… 오늘은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다.'
잔뜩 표정이 굳어져 있는 쿄코가 보였다.
"쿄코, 왜 그래?"
쿄코의 옆으로 가서 물었다.
"아, 아가씨…. 그게……."
쿄코는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긴장했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쫑긋 서 있었다.
"연승하는 손님이 있어서……. 벌써 8연승이에요."
종지를 든 네코마타 여성-입고 있는 기모노의 한쪽 소매를 벗어 흰 천으로 칭칭 감은 가슴팍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의 맞은편에 잇는 사내의 앞에만 엄청난 수의 패가 쌓여 있었다.
"저런 상태로는 게임 진행을 할 수 없어요."
정반 도박은 양측에서 건 패의 수가 똑같지 않으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패를 맞추기 위해서는 적은 쪽이 더 내놓거나, 많은 쪽이 도로 거둬들이거나, 혹은 노름판 주최측이 부족한 만큼 채운다. 그만큼 시간이 소요되기 대문에 게임 진행이 매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러지, 아가씨? 주사위를 던지는 게 아가씨 일 아니었나?!"
멈춰진 도박판에 남자가 재촉한다.
"옳소! 어서 시작하자구!"라면서 다른 손님들도 거든다.
"손님, 오늘 판이 정말 잘 풀리십니다."
올라온 료타네코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넌 누구냐?"
"인사가 늦었습니다. 바케네코파 당주 료타네코라 합니다. 저희 가게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목님이 친히 나와 인사를 하다니 고맙구먼."
남자는 수염이 나 있는 턱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두목님이 직접 말 좀 해주게나. 저 아가씨가 겁을 먹었는지 주사위를 던지려고 하지 않아."
"이토록 승승장구하시니, 겁에 질려 손이 멎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오늘은 운이 좋아. 요물의 도박장답게 뭐 좋은 게 붙어 있는 것 같달까?"
남자가 씨익 웃었다.
"주사위는 던져야지요."
료타네코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 판부터는 저희 직원과 손님의 단독승부로 했으면 합니다."
여자 부하가 숨을 삼켰다. 다른 손님들에게서 불평이 쏟아진다.
"야, 야, 장난하냐?!"
"우리도 좀 따보자구."
"누구 좋으라고 단독 승부를 하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법도도 아니고 예의도 아닌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료타네코는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자리가 필요하시다면 다른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불만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지만 수그러들었다.
료타네코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님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상관없지. 오늘은 승부운이 좋으니까."
남자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괜찮을까?"
"한 번 보자구."
소매에서 곰방대를 꺼내서 구멍에 불을 붙였다. 곰방대를 입가에 가져가자, 네코마타 여성은 숨을 골라 호흡을 안정시키고 동작에 들어간다. 오른손에 종지, 왼손 손가락에 두 개의 주사위를 들고 두 손을 교차시킨다.
"준비되셨습니까? 그럼 갑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종지 안에 주사위를 던져넣었다. 등나무로 엮은 종지 안에서 주사위가 도는 소리가 들린다.
도박판 중앙에는 두께가 3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정방향 다다미가 놓여 있었다. 종지를 그 위에 덮는다.
남자는 여유로운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여유로운건지 하품을 한다(남자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고, 두 손은 칠칠지 못하게 사타구니에 가 있었다).
남자는 패를 한 움큼 쥐어 도박판 위에 올려놓는다.
"짝."
여자가 종지를 들었다.
"2, 6으로 짝!"
이긴 만큼의 패가 남자에게 돌아왔다. 호시는 그 도박판을 보며 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그 뒤로 남자가 연승했다.
"어떤가, 두목."
남자가 료타네코에게 말을 걸었다.
"사기 도박의 증거는 잡았나?"
료타네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사기라고 생각해서 두목님께서 직접 보러 오신 것 아닌가? 증거를 잡으려고 단독 승부를 가져간 거지? 그래서 결과는 좀 어떤가."
"아니오. 보기에는 수상한 점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왜냐하면 난 결백하니까."
"글쎄요."
"아앙?"
"어디까지나 '보기에는'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승부를 해보면 알겠지요. 손님, 이번에는 저랑 승부를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자네하고?"
남자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네. 이렇게까지 쾌거를 거둔 손님은 처음입니다. 승부를 겨뤄보지 않고 보내드리면 제게 회한이 남을 것 같아서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형님!"
남자는 몇 초 동안 생각을 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보자구. 그런데 방법은? 차례로 주사위를 던지는 건 어때?"
료타네코는 생각에 잠기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주사위를 던지고, 손님께서 홀짝만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손님의 예상이 틀리면 제가 이기는 것으로 하지요."
"좋아."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쿄코는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여자부하와 자리를 바뀌는 료타네코만 보고 있었다.
"시작할까요?"
료타네코가 입술을 살짝 홡고, 종지와 주사위를 들었다.
"그러시게."
료타네코는 두 손을 교차시켰다.
"준비되셨습니까? 갑니다."
말과 함께 종지 안에 주사위를 던져놓고 매끄러운 동작으로 다다미 위에 종지를 엎어놓았다.
남자는 패를 던지고 말했다.
"홀."
료타네코는 종지를 들어올렸다.
"4, 3으로 홀."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계속하겟습니다."
료타네코가 다시 종지와 주사위를 들었다.
"홀."
"2와 3으로 홀."
"홀."
"4와 1로 홀…."
료타네코와 일대일 승부를 시작하고 남자는 벌써 3연승이다.
남자의 패는 엄청 늘어났다.
"마실 것 좀 갖고 와."
료타네코가 말했다.
"네?"
"마실 것 말이다!"
료타네코가 거칠게 쏘아붙이자, 부하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차를 마셨다.
"호시, 알겠어?"
시호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호시에게 작게 물었다.
호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곰방패를 피웠다.
료타네코는 다 마신 컵을 부하에게 건네고 손가락 관절을 풀었다.
"그걸 사용하실 생각이신가, 형님……."
쿄코가 자세를 잡는 료타네코를 바라보았다.
"짝."
"말…! 3과 3, 짝…."
료타네코의 목소리가 떨린다.
"실패? 말도 안 돼!"
쿄코가 경악했다.
"형님의 기술이…!"
"그게 뭔데, 쿄코?"
"주사위의 숫자를 자유자재로 만든 기술이에요. 형님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익힌 기술이에요. 그게 실패한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놀아나고 있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안색이 안 좋군, 두목 양반."
남자가 느물거리며 묻는다. 료타네코와 대조적으로 남자의 안색은 좋았다.
"그만 할 텐가?"
"아, 아닙니다. 계속 하시죠."
"두목님, 이제 그만 하십시오."
"물러설 때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부하들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입 다물어. 난 아직!"
료타네코, 냉정함을 잃었군.
그 후 두 번 더 승부를 펼쳤다. 모두 남자의 승리였다(벌써 7연승이었다).
8번째 승부를 벌이기 위해 종지와 주사위를 료타네코가 들었을 때, 거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료타네코, 이제 그만해라!"
도박장으로 달려온 건 아오타보를 선두로 한 리쿠오의 백귀야행이다.
누군가 료타네코의 엉덩이에 불이 붙었으니 좀 말려달라고 부탁을 했는지 상황을 살피러 올라온 것이다.
"흠, 도박장은 이렇게 생겼구나."
갓파는 평소 자신의 페이스대로 구경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이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료타네코를 보고 있었다.
"이즘에서 물러나느 게 좋지 않겠어?"
쿠비나시 조언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쿠로타보도 료타네코를 말린다.
"…본가 여러분의 충고는 감사하지만… 전 물러나지 않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이 멍청아! 그렇게 졌으면서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오냐?!"
아오타보가 질타했고,
"맞아요! 오기를 부릴 때가 아니에요!"
츠라라도 거들었다.
"어쩔래?"
재미있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본가 사람들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난 이미 충분히 이겼거든."
"동정은 금물입니다, 손님. 저는 바케네코야의 간판을 짊어진 몸. 여기서 물러설 거였다면, 처음부터 일대일 승부를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계속 하겠다, 이건가?"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이는 료타네코를 보며 본가 일동은 '어이쿠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두목양반, 이건 어떤가?"
남자가 검지를 들었다.
"승부는 단 한번. 구경꾼들도 슬슬 이런 승부에 질린 것 같으니 마지막 한 판으로 결판을 내자구. 어때?"
"한 판…….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료타네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 다음은 상품에 논의해보자구."
"상품?"
"그래. 최후의 한 판 아니겠나. 나도 수중에 패를 남겨두는 쩨쩨한 짓은 안 해. 내가 지면 내 패를 싹 가져가라구."
남자의 말에 구경꾼들이 박수를 친다.
"단!"
남자가 말을 잇자 구경꾼들이 조용해진다.
"단, 두목 양반. 자네가 지면 이 바케네코야의 권리서를 내놓으시게."
"구, 권리서?"
반문하는 료타네코의 목소리는 구경꾼들의 환호성에 묻혀버린다.
"좋아, 좋아!"
"이거 진짜 재미있어지는데?"
휘파람을 부는 이들까지 있다.
"어쩔래?"
남자는 느물거리며 웃는다. 료타네코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두목님, 안 됩니다!"
부하가 료타네코의 어깨를 잡는다.
"승산이 없어요! 저 녀석의 감은 틀린 적이 없다구요!"
"두목님, 부탁드립니다! 이 바케네코야는 조직의 보물입니다! 제발요!"
"형님, 안 돼요!"
급기야 여자 부하와 쿄코가 무릎을 끓는다.
"료타네코, 눈을 뜨라구!"
"안 그러면 날려 버리겠어!"
쿠로타보, 아오타보가 눈에 쌍심지를 켰고,
"갓파! 물폭탄을 날려버려! 그럼 정신을 차리겠지!"
케조로가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구."
갓파가 태연자약하게 말하는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싫으면 말고. 하지만 마지막 한 판을 자네도 승낙할 바 있다는 걸 잊지 말라구. 그래놓고 안 하겠다면, 나도 떠들고 다닐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바케네코파의 두목이 남자 대 남자의 승부에서 도망을 쳤다고."
"뭐라구…?! 이 자식, 다시 한 번 말해봐!"
료타네코가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세웠다.
"할 거야, 말 거야? 말해두는데, 한 번 대답하면 엎을 수 없어."
남자의 눈이 빛난다.
"어디 한번 해보자구! 야! 지금 당장 권리서 갖고 와!"
"……나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잖아."
료타네코가 돌이길 수 없는 선을 넘는 게 보이자 한숨이 나왔다.
내 손에 있는 곰방대를 가져가는 손길이 있었다.
"?!"
"누라, 리쿠오?!"
시호는 옆을 지나친 리쿠오의 존재에 놀라 외쳤다.
"잘 되고 있냐, 료타네코."
"도련님……."
"리쿠오님! 이러시면 안 돼요! 누워계셔야죠!"
츠라라가 외쳤다.
"타마즈키한테 다한 상처가 더 벌어지면 어쩌시려구요!"
"이제 다 나았어. 젠의 약이 워낙 잘 듣잖아."
리쿠오는 내 곰방대를 든 채 료타네코에게 다가갔다.
"다는 못 들었다만, 뭐라고? 마지막 승부라고?"
"네…."
"리쿠오님! 리쿠오님도 한 말씀 해주세요! 승부를 포기하라구요!"
"도련님, 부탁드립니다! 료타네코가 지면 이 바케네코야는 저 사내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츠라라와 아오타보가 외쳤다.
"승부 상대란 게 너냐."
남자는 수염을 만지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도련님이라고 하는 걸 보니 누라구미의 차기 두목님이신 모양이군요. 그러나 본가의 권력자라고 해도 남자 대 남자의 승부에 끼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답잖은 짓은 안 한다. 료타네코, 해라."
"정말입니까?!"
"잠깐만요, 리쿠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남자, 진짜 강하다구요!"
츠라라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거 참 말이 많다. 상대가 그러지 않느냐. 남자 대 남자의 승부라고. 료타네코, 너도 그만 둘 마음 없지?"
"당연하죠."
"그럼-"
리쿠오가 곰방대를 도박판을 가리켰다.
"내가 입회인이 되어주지. 네 기개를 여기서 보여봐라."
정식 선언문이 되었다.
바케네코파의 비명과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한데 얽켰다.
"그럼, 갑니다!"
"짝."
도박장의 모든 시선이 종지에 쏠렸다. 료타네코가 종지를 들어 올렸다.
"1과 1로 짝…!"
료타네코가 도박판 위로 엎어지고, 도박장을 날려 버릴 것 같은 환호성과 노성, 비명 소리가 쏟아졌다.
"두목!"
"두목님!"
"형님!"
바케네코파의 부하들이 료타네코에게 매달려 꺼이꺼이 울었다.
도박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아래층에서도 종업원들이 달려와 상황을 파악하고 모두 눈물을 흘렀다.
"자, 두목 양반."
남자의 목소리에 료타네코는 도박판에서 고개를 들었다.
"모두 모여 우는 건 상관 없지만, 줄 건 주셔야지."
남자가 관절이 튀어나온 손을 내민다.
"내놓으시게나, 바케네코야의 권리서."
"줄 것 없다."
리쿠오가 말했다. 그 한 마디에 좌중이 물이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도련님…."
"료타네코, 권리서는 건넬 필요 없어."
팽팽한 정적 속에서 리쿠오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내게는 보였다. 이 녀석의 사기술이."
"이봐, 차기 두목인지 뭔지 하는 양반. 무슨 헛소리야?"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증거가 어디 있소? 친분 있는 사람이 졌기로서니, 승부에 딴지를 거는 건 법도가 아니지."
"협잡꾼이 감히 법도를 언급하시겠다? 증거라…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여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쿠오는 곰방대를 뒤집었다. 곰방대 끝에서 재가 날리며 도박판 중앙, 솟아오른 다다미 위로 떨어진다.
1초 후.
"앗 뜨거어어어-!!"
남자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나왓다. 동시에 남자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사라진 뒤에 작은 너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너, 너구리?!"
너구리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눈을 한 채, 무슨 주머니 같은 것을 들고 열심히 후후 불고 있었다.
"도련님! 이건 저 녀석의 고환!"
료타네코가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그래. 사기의 정체는 이거다."
리쿠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참! 도련님은 어떻게 그런걸!" 츠라라가 비명을 지르며, 시호가 얼굴을 붉히며 도박판에서 등을 돌렸다. 반면 케조로는 "꼬마 너구리의 물건 치고는 제법이네." 라면서 그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색도 형태도 자유자재라 이건가? 편리한 주머니군. 야, 너구리. 너 시코쿠 출신이지?"
"헤헤, 에헤헤. 역시 신통하십니다."
너구리는 비굴하게 웃으며 방석 크기였던 주머니를 원래 크기로 되돌린다.
"이 녀석의 정체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의 고- 에헴, 그 주머니로 어떻게 사기를 친 겁니까?"
"답을 알고 나면 너무 단순해서 김이 빠질걸? 저 녀석은 자유자재로 저 주머니를 조종할 수 있거든. 색갈은 투명하게 만들고, 두께도 얇게 만들어서 저 다다미를 그 주머니로 덮어둔거지. 알겠냐? 즉, 종지를 엎을 때마다 이 녀석 주머니 위에 주사위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던거지. 말하자면 이 녀석의 손바닥 위에 주사위를 던진 거다. 손바닥 위에 있는 주사위를 이 녀석이 마음대로 조종 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아…."
료타네코는 신음했다.
"이게 감히…!"
료타네코는 너구리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남자에게 갈채를 보내왔던 구경꾼들도 분위각 바꾸자 무책임하게 각오하라는 둥 너구리를 위협했다.
너구리는 "히이이익!" 하며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해주십시오! 잠깐 장난 좀 치려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재미가 붙어서…."
"야, 너구리."
리쿠오가 몸을 내밀며 서늘한 목소리로 묻는다.
"너, 타마즈키의 부하냐? 대장이 지니까, 앙심을 품고 누라구미의 산하 도박장이나 엎어보자 싶었나?"
"앙심이라니오!"
너구리는 넙죽 엎드린 채 몸을 움츠리더니, 당장이라도 꺼져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자분자분 설명을 한다.
"들키지 않다보니까 그만 권리서를 달라고 호기를 부렸던 것입죠, 헤헤."
"이 자식…! 마음 같아서는 다시는 같잖은 술수를 부리지 못하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그만두마. 승부가 이렇게 커진 건 머리에 피가 몰려 제대로 판단을 못 내린 내 잘못도 있으니까."
"잘 아는 구나, 료타네코. 이번 일은 네게도 좋은 약이 되었을 테지."
"네, 네에."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료타네코가 다시 너구리를 바라보았다.
"뭐, 이렇게 됐으니 이번 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놓아줄 테니 시코쿠든 어디든 가 버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관대하시네요. 아래층에서 맛본 술과 안주 맛도 죽이고 가격까지 착해서 감동이었는데, 고향에 돌아가면 바케네코야에 대한 입소문 좀 내야겠습니다."
넙죽넙죽 인사를 하며 꼬마 너구리가 떠났다.
"시호, 우리도 그만 내려가자."
"…괜찮네."
"뭐가?"
"네 약혼자."
"내려가자. 선라이즈 세토1기차 시간 늦지 않겠지?"
호시는 시호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도쿄와 시코쿠 타카마츠를 연결하는 야간 열차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