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쿠가 데리고 와준 계곡의 맑은 물에 멘마는 신을 벗고 발을 집어넣은 채 발장구를 치고 있었다.
"시원해?"
"응!"
환한 웃는 얼굴에 이타쿠의 표정도 풀어져서 미소짓었다. 타인에게 어느 정도 선을 긋은 흑신은 반려자 앞에서만 무장을, 경계를 풀었다.
"표정 좋아보이네~!"
옆에서 들려오는 놀림기 가득한 목소리에 이타쿠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형에게 무슨 말버릇이야, 이타쿠!"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야 오늘 감시는 이 형이 맡았으니까."
시스이가 암부 가면을 벗고 웃는 얼굴을 보였다.
"누가 형이냐. 그쪽과 절연한지가 언젠데."
"핏줄이 절연한다고 절연되는 줄 알아~? 이타쿠는 똑똑하면서 가끔 무식한 소릴 한다니까! 우치하 일족이 아니어도 넌 레이 누나와 나의 동생이야."
"…말이 안 통하는군."
멘마가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이타쿠와 시스이를 보고 있었다.
"시에미!"
시스이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멘마를 크게 불렀다. 멘마는 천천히 물가에서 나와, 신을 신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이타쿠 뒤쪽으로 가서 섰다.
"안녕, 시에미."
"…카가미의 손자, 우치하 시스이."
경계빛이 섞인 은회안에 시스이는 쓴 웃음을 짓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에미는 나뭇잎 마을에서 배척하는 우치하를, 나루토를 향해 상냥한 얼굴과 다정한 미소만 보여줬다. 단 한 번도 저런 경계어린 시선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타쿠."
"뭐?"
"그녀와 바깥에 다닐 때 주위 소문에 신경쓰는 것이 어때? 너 로리콤이란 소리가 들리고있던데."
"안 그래도 어제 레이가 와서 한바탕 잔소리하고 갔어. 고작 손등에 입맞춤을 한 것을 가지고 로리콤이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충분히 로리콤 같은데."
"로리콤은 아니지! 로리콤은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들에게 발정하는 변태고, 난 시에미에게만 하거든!"
시스이에게 당당히 말한 이타쿠는 멘마를 끌어안았다. 멘마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 속으로 안겨들어갔다.
"애초에 길거리에서 손등키스는 왜 한 건데?"
"5살 시에미 손이 너무 작아 귀여워서."
"……."
"봐."
이타쿠는 시스이에게 멘마의 작은 손을 보였다.
"이렇게 작은 손으로, 우즈마키 일족을 부흥시켰어. 대단하잖아!"
"…그렇네."
"너무 작아서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야!"
"그만해."
두 사람의 달콩한 모습에 시스이는 시에미가 탈주하기 전 과거가 떠올라 추억에 잠긴 아련한 표정으로 변했다.
**
깔끔한 다다미 방 5인실을 보고 쿠노이치들은 감탄했다. 창가에는 침구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입구 근처에는 좌식 테이블과 방석이 네 개 있었다. 장식품인지 벽에 걸려있는 그림 하며 곳곳에 세워진 도자기들도 기품 있어 보였다. 테이블 위의 나무 쟁반에는 찻잔과 주전자, 간단한 간식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좋네."
"예쁘다!"
관광하기 위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동기들 모습에 텐텐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해?"
"응? 이제 관광할 거니까.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야지!"
"으응?"
이해가 되지 않는지 애매한 소리를 내자 텐텐이 가방을 뒤지다 말고 검지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왕 놀러 왔으니까 기분을 팍팍 내야 한다구!"
"맞아!"
카린까지 동감하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타에는 고모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멋쩍은 마음에 턱을 슥슥 긁었다.
"타에, 설마 잠옷만 챙겨온 건 아니지?"
"아니야. 다른 옷도 있어. 유카타도 있고."
"어떤 옷이야? 응?"
사치코가 보여달라듯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와! 예쁘다!"
카린은 연한 보라색에 여러가지 크기의 흰 꽃이 그려진 유카타을 꺼냈다.
"당주님이 골라주셨어! 츠쿠하네 상단의 신작이야!"
"그 츠쿠하네 상단의?!"
"우즈마키 당주님, 대단하네!"
텐텐과 사치코는 유카타 안쪽에 새겨진 달과 츠쿠하네라는 자수에 우와, 우와 감탄했다.
"타에는?"
타에의 옷은 진갈색에 붉은색, 주홍색, 노란색의 크고 작은 꽃이 그려진 문양이었다. 제법 화려한 문양이었다.
"이거…."
타에는 옷을 본 순간 눈동자를 부릅 뜨고는 안쪽 천을 확인했다. 츠쿠하네라는 자수와 달이 수놓아져 있었다.
"타에 것도 츠쿠하네 상단 거야?! 칸나씨가 사주신 거야?"
"뭐."
타에는 떨떠름하게 유카타를 바라보았다.
'선물이야.'
메이코가 준 물건은 그때 전부 버렸을 텐데. 왜 아직도 남아있을까? 칸나 고모의 짓일까?
"타에?"
"안 입을 거야?"
그녀는 동기들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유카타로 갈아입었다. 유카타로 갈아입은 다섯 명의 소녀들은 볼거리가 가득한 관광 마을을 걸었다. 상점가는 축제날을 연상시키는 길거리 음식이 잔뜩 팔고 있었고 악세사리나 인형 따위를 파는 노점상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온천을 주로 즐리러 오는 거 같으니까 사실 다른 관광거리가 딱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데.
"앗 우리 저거 구경 가보자!"
"어?"
"찬성!"
"에…."
"빨리 빨리!"
텐텐, 사치코, 카린은 타에와 히나타를 붙잡고 먼저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렇게 노점상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가판대에서 물건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사 먹기도 하고 길거리 공연도 보며 정처없이 마을을 돌아다녔다.
저녁밥 이후 온천을 즐기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자기 전 준비를 끝내고 여자들의 수다를 떨었다.
"연극 재미있었어!"
"그치만 배우가 좀 아쉬웠지. 특히 공주님!"
"히나타가 더욱 잘 어울릴 거 같아."
"에…? 아, 아니야."
"왜? 어마어마한 미인의 공주님이라는 설정이면 히나타 정도는 되어야지."
"음 그건 인정."
사치코의 말에 텐텐, 카린이 동의하자 히나타는 퍽 당황스러워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히나타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난 역시 공주님은 시에미 쪽이라고 생각해…."
"응?"
"금발에, 청록색 계열 눈동자에… 늘 반짝반짝하고… 왕자님, 공주님은 뭔가 그런 느낌이니까…."
말을 마치고는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화악 붉어지는 히나타였다. 히나타는 뜨거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라했다. 저거 시에미를 뜻하는 게 아니라….
"에엣, 그러니까 방금 그건, 내가 따, 딱히 금발에 파란 눈을 좋아한다는 듯은 아니고…!"
역시 공주님보다 왕자님 나루토를 떠올린 거잖아. 타에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시에미는 공주가 아니야."
카린이 딱잘라 말했다.
"확실히 시에미는 공주처럼 아름답고 뭔가 기품이 넘치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 보호되는 공주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는 여왕이지."
"아. 확실히."
타에도 세차게 동의했다.
"왕자님이라면 이타쿠를 말하는 거지! 잘생겼지! 쿨하지! 멋지지! 세 박자를 골고루 갖쳤잖아!"
"기각. 그 놈은 성질 더러운 폭군이다. 아니 이중인격인가."
카린이 발그레하며 말하자 타에가 딱 잘랐다. 그리고 베개가 날아왔다.
"윽! 무슨 짓이야, 카린!"
"흥! 메롱이다!"
안면에 직통한 베개에 눌린 코를 문지르며 타에는 근처에 있는 베개를 던졌다.
"여유~!"
"꺅!"
카린은 감지로 베개를 휙 피했다. 그 베개는 사치코의 얼굴을 때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사치코가 베개를 들어올렸다.
"뭐야?! 베개싸움?! 나 동경했는데! 하자, 베개싸움!"
텐텐이 외치는 순간, 베개 싸움에 돌입해 몇 십분동안 그녀들은 방안을 뛰어다녔다.
"타임! 야식 먹자!"
한참 후에 사치코가 외쳤다.
"뭐야, 저녁을 그렇게 먹고 또 들어간단 말이야?"
"원래 간식배는 따로 있는 거야!"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 사치코가 타에에게 눈을 찡긋했다.
"나도 찬성!"
텐텐이 외치고 다른 사람들도 거부하지 않자 사치코는 테이블에 세팅된 찻잔을 꺼내 간식과 함께 본격적인 티타임을 준비했다. 그걸 본 히나타가 도왔고, 텐텐은 자신의 가방에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
카린과 타에는 엉망이 된 이부자리를 정리해서 마지막으로 세팅된 테이블에 앉았다. 뜨거운 김을 내뿜은 찻잔을 받는 순간 그녀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래, 카린, 타에?"
두 사람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려다 잠시 멈칫하자 사치코, 텐텐, 히나타가 어리둥절히 보았다.
"냄새가…."
"냄새?"
"평범한 녹차 향 아냐?"
"나도 잘 모르겠어…."
카린은 뭔가 떠올랐는지 황급히 찻 주전자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주전자 속에 둥둥 떠있는 말린 잎 모양을 확인하자 그녀의 손에 있던 뚜껑이 툭 떨어졌다.
"카린?"
"…뱉어."
"!"
"마시지 마! 뱉으라고!"
당황한 카린이 외치고 히나타가 쥐고 있던 찻잔을 놓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쨍그랑.
"아…."
"히나타?"
옆으로 휘청 넘어가려는 히나타를 텐텐이 황급히 붙들었다. 히나타는 느리게 눈을 감빡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몸이…."
"말하지 마, 히나타! 그냥 눈 독바로 뜨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게 뭐야, 카린?"
"독초야. 목숨을 잃거나 장애가 생기는 종류가 아니지만 단 몇 그램만으로도 일시적으로 근육이 이완되고 정신을 잃게 하는 독초."
"?!"
"너희 얼마나 마셨어?"
"아…!"
"텐텐! 사치코!"
당황해하는 텐텐과 사치코의 얼굴에 타에는 낭패감을 느꼈다. 곧 얼마 안가 두 사람도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예상대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카린과 타에는 당황했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두 사람은 소름이 짝 돋았다.
"손님, 안이 시끄러워서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셨나요?"
"아뇨. 괜찮아요."
타에는 최대한 떨리는 목소리를 숨겼다.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치워드릴까요?"
덜컹, 하고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덜컹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잠금장치를 걸어놓은 덕에 당장 방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손님?"
"괜찮아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카린이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이 여전히 있다고 손짓으로 말했다.
"흉흉한 기세야."
"젠장…."
방금 전까지 행복한 여행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너무 방심한 걸까.
"포위망을 뚫고 나뭇잎 마을로 갈까."
"그 편이 더욱 낫겠지. 수는 많지만…."
"응."
타에와 카린은 결단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으니 살짝 휘청이고 말았다.
"아?"
이상하다는 걸 인식하고나서야 공기 중에 섞인 희미한 냄새를 느낄 수가 있었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갔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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