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한 호텔 식당에서 치세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른한 분위기와 퇴폐적인 페로몬을 뿜는 그녀를 남녀노소가 힐끔 보며 얼굴을 붉혔다.

 

"……머리 아파."

 

이 '내가' 미약에 당할 줄이야. 스쿠나의 손가락을 먹고 몸이 만독불침이 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게 바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건가. 치세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두통에 관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치세짱!"

"자, 사 왔어."

 

콧노래라도 부를 기세로 들떠 보이는 두 남성이 앞에 앉았다. 동시에 더 많은 시선들이 쏠리자, 치세는 두 남성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래, 치세짱?"

"우리 얼굴에 뭐 묻었어?"

"새삼스럽게 너희가 잘생기고 멋져 보이네."

 

어젯밤의 후유증 때문인가? 미약이 덜 빠져나갔던가.

 

"에?!"

"아?!"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두 남성의 얼굴에 순식간에 불이 붙였다. 정말로 화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목 밑에서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결국 귀 끝까지 붉어졌다.

치세는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이 사 온 피임약을 먹었다.

 

'감히, 순진한 츠미키를 노렸다 이거지…….'

 

누군지 몰라도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전노인 메이메이 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보니, 파티를 연 목적을 전부 달성했나?'

 

첫째, 유키미츠의 존재를 밝히고 주술계에 소개하기. 

둘째, 도쿄와 교토 1학년들끼리 교류하기(이때 유키미츠는 메이메이 씨의 남동생인 우이우이와 통성명했다).

셋째, 토우지 일이 끝날 때까지 이나미 현 당주를 파티에 머물게 하기(덧붙여서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넷째, 주술사 개개인의 능력(+가능성) 확인하기.

마지막 다섯 번째……

 

"미안. 많이 기다렸니?"

 

긴 생머리의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혀요, 츠쿠모 씨."

 

마지막 다섯 번째, 츠쿠모 유키를 만나는 것. 원래라면 연회장에서 대화를 했어야 했는데, 하필 그 순간에 미약의 효과가 나타나서…… 처음으로 3P를 했다. 추태를 떠올리니 (애써 진정했던) 두통이 다시 밀려올 것 같았다.

 

"치세?"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왔으니 치세는 고죠와 게토에게 어서 일어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너무해, 치세짱……."

"먹고 버리다니……."

"뭘 새삼스럽게."

"못됐어."

"나쁜 여자네."

"너희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이네."

 

치세가 뭘 새삼스럽게 말하냐는 투로 말했다. 원래부터 착한 사람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후시구로는 자신을 선인이라고 칭했지만, 스스로가 선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불쌍한 척하지 말고 어서 가. 너희들, 해외 출장이 있잖아."

 

쉭쉭 손을 휘젓으며 두 사람을 내보냈다. 츠쿠모는 축 늘어진 채 떠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꽤나 아끼고 있네."

 

두 사람이 식당에서 모습을 감추자 츠쿠모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응. 왜냐면 고죠 군이 하고 있는 눈가리개와 게토 군이 하고 있는 팔찌, 유메미테가 항상 몸에서 빼놓지 않던 주구였으니까. 너에게 소중한 물건 아니었니?"

 

모친은 천여주박 때문인지 조그만 달빛에도 눈이 타들어갈 듯이 고통을 느꼈으며, 음식을 먹으면 본연 재료와 들어간 양념의 맛이 너무 느껴서 차라리 어떤 맛도 느끼지 않길 바랬다.

그래서 주구를 만들었다.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저보단 육안과 주령구 때문에 힘들어하는 두 사람에게 필요해서요."

 

츠쿠모가 치세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모친의 유품을 타인에게 넘겨도 미련 없이 구는 치세의 행동은 꼭…….

 

"잡담은 여기까지 하죠. 서로 바쁘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요."

 

치세는 샐쭉하게 웃으며 그 시선을 못 본 척했다.

 

*

 

이나미가의 당주 자리에 제 조카를 앉혔지만, 사카즈키 치세가 그 가문을 장악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주술계에 없었다. 이나미가는 상전술식 소유자 사카즈키 치세를 광신도처럼 떠받았다.

치세가 가문으로 들어오자, 몇몇 원로들이 실종되었지만 소리소문없이 묻혔다. 전대 당주의 세 번째 부인의 아들-이나미 미나토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되어 주변 눈치를 열심히 보는 중이었다. 

 

"고모."

"응?"

"엄마는 오늘도 바쁘데?"

"그런 것 같더라."

 

토우지가 불법 암시장에서 가져온 것들 전부 공방으로 보냈기에, 공방은 현재 주구 재료들이 넘쳐날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공방에 소속된 주구사-미츠에 포함-들은 현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유키미츠는 엄마가 없다고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사물을 잘 파악하는 총명한 아이다. 유키치와 미츠에를 닮아 머리도 뛰어나고 두뇌회전도 빨랐다.

 

"응."

 

역시나. 제 엄마가 없을 틈을 타서 하고 싶은 말이라던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나 보다.

 

"고모는 왜 가주가 되지 않는 거야? 아니 애초에 고모는 가문을 싫어하면서 왜 남겨둔 거야? 차라리 없애버리면 되잖아."

 

자신이 당주직에 앉아도 되냐고 유키미츠가 물었다.

 

"……누구에게 들었어?"

"미나토 씨."

"아직 덜 맞았군. 당주에게 그딴 망언을……."

 

열심히 눈치를 보면서 얌전히 있길래 내버려 뒀더니. 치세가 세차게 혀를 찼다. 

 

"고모."

 

미나토에게 내릴 벌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유키미츠에게 답을 줘야겠지.

 

"'속박'에 대해 배웠니?"

"응."

 

설명할 수고가 덜 들게 되었군.

 

"고모는 '이나미'를 파멸시킬 수 없다는 속박을 걸었어. 그러니 망하게 하거나 없앨 수 없어."

 

그 속박을 맺고 이나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나미'가 아닌 '사카즈키'의 성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주직은 혈통이 아닌 가문 내에서 제일 강한 힘을 지닌 주술사가 앉는 자리야. 당연히 이나미 유키미츠의 자리야."

 

미나토보다 유키미츠가 주력량도 많고 강하다. 물'만' 다스릴 수 있는 미나토보다는 물을 지배하고 얼음으로 만들어내는 유키미츠쪽이 당주직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주님."

 

문 밖에서 어린 시종이 유키미츠를 불렀다. 

 

"카모 노리토시 님이 오셨습니다."

"벌써?"

 

치세가 몸을 일으키자 유키미츠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치세는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하는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모른 척한 후 방문을 열어젖혔다.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렴."

 

유키미츠에게 말하면서 치세의 시선은 그 목에 둘러져 있는 뱀 식신에게 향해져 있었다. 뱀 식신은 치세의 시선을 알아쳤는지 유키미츠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까닥 고개만 작게 움직였다.

 

"-쳇."

 

복도를 나오자 뒤로 혀를 차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다과시간이 끝나자 치세는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현재 치세는 전 당주가 어질러놓은 걸 정리하고, 이나미가를 부흥시키려고 바빴다. 

 

"오셨습니까, 치세 님."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안경을 치켜 올렸다.

그의 이름은 이나미 테루. 유키미츠에게 붙어 있는 시종, 코우의 형으로, 현재 치세를 도와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전 당주가 어지럽힌 것이 많다보니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오야의 동급생인 테루는 그 역할에 딱 맞았다. 이나미 원로와도 가까운 사이가 아닌 실력자니까.

 

"테루, 미나토에게 2급 임무를 줘."

"에?"

"말을 듣지 않는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라지."

"하지만, 나나가……."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아뇨."

 

미나토의 (자칭) 약혼녀가 날뛰는 게 이쪽과 무슨 상관있다고. 치세에겐 미츠에와 유키미츠의 안위만 중요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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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있는 수많은 참석자들은 단 한 사람이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친분이 있는 자들, 혹은 친분을 이어나갈 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참석하는 게 확실한가?"

"확실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바쁘다는 특급 전원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런 자리를 질색하는 고죠랑 게토, 일본에 있지 않고 해외를 돌아다닌다는 츠쿠모를 사람들은 힐끗힐끗 보았다. 사람들은 특급 주술사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들은 가까운 사이가 아닌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그 사람이 무안해지도록 무시했다.

 

"치세짱, 늦네. 지각할 리가 없을 텐데."

 

검은 정장의 흑발 남성, 하이바라가 말했다.

 

"일부러 늦는 거겠죠."

 

쿼터 혼혈의 남성, 나나미가 대답했다.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참석자 전원이 모인 후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정답이라도 하듯 파티장의 문이 열렸다.

치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 뒤로 기모노를 입은 여성과 정장을 입은 소년이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들어왔다.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산옥잠화로 꾸며진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미녀에게 향했다.

따끔따끔한 시선과 쑥덕이는 소리에 공포를 느낀 유키미츠의 몸이 저절로 움츠려 들었다. 유키미츠는 백조처럼 우아하게 선 치세의 곧은 등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불안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치세가 유키미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불안하니?"

"으응, 조금."

"괜찮아. 내가 있는 한 널 건드릴 존재는 없을 테니."

"……고모."

 

부드러운 목소리의 온기가 유키미츠를 안심시킨다. 

 

"자, 고모의 지인들을 소개해줄게."

 

'고모'라는 단어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예 크기를 조절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주최측과 인사가 끝난 치세 일행에게 다른 참석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짧게 대화를 끝낼 것 같았던 치세가 유들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자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그들을 치세는 방긋 웃는 얼굴로 상대했다. 

 

"치세."

 

미츠에가 지루한 얼굴인 아들을 안아올렸다.

 

"사토루들에게 가 있어. 금방 갈 테니까."

"응."

 

치세의 허락이 떨어지자 미츠에는 사람 무리 속을 헤쳐 나왔다. 모두들 품에 안긴 아이가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차렸는지 '유키치'라는 이름이 끊임없이 귓가로 들려왔다. 

 

"선생님!"

 

도쿄 고전 교직원 그룹에서 하이바라가 제일 먼저 그들을 맞이했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이 미츠에와 유키미츠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아이가……."

"응. 유키, 인사하렴. 엄마가 고전의 선생님일 때 가르쳤던 학생들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이나미 유키미츠라고 해요!"

 

그들은 유키미츠에게 각자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선생님이 유키치와 연인일 줄은 몰랐네요."

 

게토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그거야, 비밀 연애 중이었으니까."

"비밀 연애! 언제부터 사귀었어?"

 

고죠가 끼어들었다. 미츠에는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여성, 이오리 우타히메와 눈물점의 미녀, 이에이리 쇼코와 함께 있는 아들을 힐끗 본 후 대답했다(유키미츠는 이에이리의 어깨에 앉아있는 분홍색 해파리 식신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유키치 군이 고전에 입학했을 때부터."

"우와! 그럼 데이트도 했겠네!"

"물론. 주변의 눈을 피해서 했지."

 

데이트했던 과거를 떠올린 미츠에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났다. 하지만 곧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를 본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엄마?"

 

미츠에의 주변 공기가 변했다는 걸 느꼈는지 유키미츠는 의아한 목소리로 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된 50대의 남성을 쳐다봤다. 그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꼭 가면을 쓴 얼굴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호오, 그 아이가……. 네가 유키치와 그런 관계일 줄은 몰랐구나."

"우리 관계가 밝혀지면 어디 사는 돼지 녀석의 탐욕에 불을 짓피는 꼴이니 비밀로 했어."

"……그럼 치세와 마나부의 약혼은 역시 위장이였던가."

 

치세는 위장이었지만, 마나부는 아니었을 거다. 마나부는 항상 뜨거운 시선으로 치세를 봤다. 타인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감추는 걸 잘 했지. 우연히 목격하지 않았다면 마나부가 왜 주저사로 타락 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외야에 관심을 가질 틈이 있다니, 신기하네. 이나미 가문 내부가 어수선할 텐데 말야."

 

비꼬는 목소리에 이나미 당주-유헤이는 치세를 눈에 담았다. 금년도에 입학하는 열다섯이 된 그녀는 어릴 때보다 아름다워져있었다. 성숙미를 더한 아름다움은 절벽에서 피어난 꽃 같아서, 남심을 자극했다.

 

"그 더러운 눈깔 치워. 파버린다?"

 

음흉한 시선을 알아 본 고죠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들이나 아비나, 똑같군.'

 

치세는 기분 나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하;; 딸아이와 손자 그리고 조카를 보러 왔을 뿐인데, 방해꾼들이 많군요."

"개소리!"

 

미츠에는 분노에 어린 아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육두문자를 입 밖으로 냈다. 그녀의 입이 험악하다는 걸 알고 있는 하이바라와 나나미가 재빨리 유키미츠의 귀를 막았다. 

 

"이 씹어먹을 XX……."

"미츠에. 착한 말."

 

게토-처음 본 미츠에의 모습에 돌처럼 굳어진 우타히메 제외-들이 지켜보고만 있자 치세가 미츠에를 말렸다. 미츠에가 임신하자, 그때를 노려서 교정시켰는데 이렇게 날아갔다.

 

"넌 점점 유메미테를 닮아가구나."

"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유메미테 님의 이름을 입에 담아?!"

 

미츠에가 버럭 외쳤다. 기껏 진정시켰는데.

 

"유메미테 님을 추방시켰으면서!"

"추방?!"

 

흥분한 미츠에가 20대 고죠들이 모를 일을 꺼냈다. 더 내버려뒀다가 그 이상의 말까지 할 것 같았기에 치세가 움직였다. 유헤이 앞에 선 치세는 대화가 주변으로 나가지 않게 물의 장막을 펼쳤다.

물의 장막이 나타나자 미츠에가 분을 삭였다. 씩씩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추방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 말에 미츠에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졌다.

 

"치세짱의 어머니는 추방된 거야?"

"어라,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네. 분명히 말했어요. 유메미테 님을 추방시킨 주제라고요."

"이런…."

 

낭패다라는 얼굴로 미츠에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회피했다. 듣기 전까지는 저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겠지. 

 

"……꼭 들어야겠니?"

 

고죠와 게토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다는 눈빛에 미츠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술계가 폐쇄적인 만큼 배척도 심하고 편견도 심한 거 알지?"

"그건 모두 알고 있는……."

"일단 들어."

 

고죠가 끼어들려고 하자, 미츠에가 막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보신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서슴치 않지. 하지만 유메미테 님은 그걸 막을 수 있어. 왜냐고? 그야 유메미테 님의 술식이 '미래예지'거든."

"!"

 

사기적인 술식을 가진 치세의 어머니는 딸보다 더한 사기적인 술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라? 왜 그렇게 놀라? 치세도 '예견안'을 지녔잖아……?"

"!!"

 

알지 못했던 그들은 놀라 말이 안 나오는지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놀랐는지 언제나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나미조차 입을 쩍 벌린 상태였다.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아무튼! 그 분은 그 당시의 주술계의 구원자였어. 덕분에 불필요한 희생이 거의 사라졌거든."

 

침묵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미츠에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 분이 남편으로 선택한 사람은 역사 있는 주저사 계보 집안의 남자였어."

"주저사?!"

"왜?"

"그거야말로 내가 알고 싶어. 그리고 그 당시엔 일반인였어."

"일반인? 비주술사란 소리입니까?"

"응. 근데 배척과 편견에 견디지 못하고 떠났고, 주술계는 기다렸다듯이 주저사로 낙인 찍었지. 비주술사인 남자를 말야. 그리고 이나미 현 당주와 몇몇 원로들은 유메미테 님을 연좌제로 끌어들여 주술계에서 추방시켰어."

 

25년 전 얘기야. 미츠에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미츠에의 말이 끝나고 유헤이는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힌 채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갔다. 치세는 냉소적인 미소를 띈 채 유헤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치세."

"고모라고 불러야지."

 

유키미츠가 부르자 치세의 싸늘한 얼굴은 얼음이 녹듯이 사라졌다. 부드러운 얼굴이 되자 "배고프지 않아? 식사하러 가자."라면서 유키미츠를 이끌었다.

 

"어떠니, 이 세계는? 음습하지?"

"…응."

"다음 차기 당주는 네가 될 거야, 유키미츠. 항상 정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마렴. 주술사의 교우 관계·파벌·금전의 흐름·성벽·부적절한 관계 등을 장악해두렴. 이 곳은 약육강식의 세계. 약하면 빼앗길 뿐이란다."

"잘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모든 걸 갖는 건 무리야. 하지만 유키미츠라면 할 수 있어."

 

치세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키미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치세의 손길을 느꼈다.

파티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나미가의 새로운 당주로 '이나미 유키미츠'가 되었다. 전 당주 유헤이는 주저사와 내통한 죄로 실각되었다. 그 소식은 빠르게 주술계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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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미츠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앞으로 유키미츠에게 주술의 기본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야."라고 소개했다-에게 재잘재잘 떠들고, 하하 웃는 친화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옛 시대의 헤어스타일을 한 시즈요의 아들-카모 노리토시는 어색함 없이 그를 대할 수 있었다.

 

"내 조카는 외형뿐만 아니라 성격도 제 아빠를 쏙 닮아가네."

"그러네."

 

미츠에는 치세의 말에 수긍했다. 누군가와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친화력, 저건 유키치의 천성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직원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관리를 받은 후 정장을 입은 시즈요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섰다.

 

"예뻐졌어요, 시즈요 씨! 그렇죠, 선생님?"

"아."

 

카모는 제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유키미츠는 멍한 카모에 키득키득 웃었다.

 

"하하, 고마워, 유키미츠 군, 노리토시 군. 하지만 좀 부끄럽네."

"이 옷도 괜찮네. 이것도 살게요."

"네."

"엑! 치세짱! 괜찮아! 더는 필요 없어!"

 

시즈요가 말렸지만 치세는 듣지도 않고 추가에 추가를 더했다. 그녀 손에 들린 새까만 블랙 카드가 형광등 아래서 번쩍번쩍 빛났다. 

그 결과, 치세들이 가게를 나설 때 점장을 비롯해서 전 직원이 나와 허리 숙여 그들을 배웅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오늘 작정을 했군."

"기뻐서 그래."

"기뻐?"

"응. 더는 조용히 움직일 필요 없잖아."

 

유키미츠의 존재를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 주술계에 그의 존재를 공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치세, 나 배고파!"

"그래? 유키미츠는 뭐 먹고 싶어? 유키미츠가 원하는 곳으로 갈 테니 골라봐."

"정말?! 그럼 어디 가지?"

 

유키미츠는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유키미츠의 양 쪽에서 카모 모자母子가 타인과 부딪치지 않게 도왔다.

 

"애 버릇 나빠져." 

"괜찮아."

 

치세가 말했다.

 

"누이? 맞구만, 누이!"

 

검은 승용차가 멈추고, 그 차에서 옛 서생書生의 차림을 한 남자가 내렸다. 피어싱을 하고, 금발에, 여우를 닮은 얼굴형의 그를 보자마자 미츠에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데이, 누이."

"그러네. 오랜만이네."

 

치세는 고삼가 중 하나인 젠인의 차기 후계자, 나오야에게 인사를 건넸다. 교토에 오면 만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한 적 없지만,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이야……. 어디선가 투명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치세의 손가락에 앉았다.

 

"임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봐. 실력이 늘었는걸."

 

정보를 읽고 나비를 창공으로 돌려보낸 후 치세는 감탄조로 말했다. 안 본 사이에 나오야의 실력이 늘었다. 

 

"염탐꾼 아이가? 왜 보고 그래?"

"이게 내 술식인걸."

"말버릇하곤……."

 

나오야가 싫은지 미츠에가 툴툴거렸다.

 

"닌 도망칠 때 언제고 와 누이 옆에 있는 기고?"

"도망이라니! 누가!"

"그만."

 

싸우려는 둘을 막았다.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키미츠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오야, 미안하지만 우린 그만 가봐야 해."

"벌써 가? 오랜만에 만나데이 아이가……."

"카모 파티 때 만나."

"쳇."

 

순수히 물러나 주는 나오야에 치세는 "고마워"라고 말하면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츠에는 얌전히 치세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부비하는 나오야를 역겹다듯 응시했다.

 

"왜 그렇게 나오야를 싫어해?"

 

나오야가 차에 올라타자 치세가 물었다.

 

"나만 누이라고 불러서?"

 

나오야의 어머니, 미츠에의 아버지, 어머니-이렇게 셋은 남매다. 하지만 나오야는 미츠에를 사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자기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에게 누이라 불리면 더 기분 나뻐. 내가 그 자식의 핏줄이라는 걸 인정되는 꼴이잖아."

 

미츠에는 생부를 싫어했다. 하긴 그런 놈이 생부라면 싫어지는 게 당연하다.

미츠에의 생부이자 현 이나미 당주는 태어난 자식들이 뛰어난 술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버렸다. 그런 주제에 미츠에가 반전술식을 구사한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이용하려 들었다.

 

"내가 나오야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싫은 짓을 하니까."

"응?"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치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나오야가 처음엔 밉살맞은 녀석이었지만 우리 남매가 그를 열심히 개조했는데. 싫은 짓을 할리가 없을 텐데?

처음 만나자마자 나오야는 자신에게 "자신보다 3보 뒤로 걷지 않는 여자는 등에 칼 맞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오야의 가부장적 사고와 여자를 깔보는 언행은 매사 능구렁이마냥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던 유키치마저도 분노하게 했다. 결국 유키치와 합심해서 그 정신머리를 단단히 뜯어놓았다(덕분에 훗날 마키와 마이 쌍둥이 자매를 보호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숭을 떠는 여우짓을 하는 남자는 질색이야. 그런 놈에게 시집가면 안 좋아. 그러니 거들떠도 보지 마."

"풋!"

"뭐야, 왜 웃는 거야……?"

"아쉽게도 그런 남자가 취향인데. 어쩌지."

"뭐!!! 여우짓하는 남자가? 왜!!"

"나한테만 잘하는 남자는 매력적이잖아."

 

미츠에는 믿기지 않는다듯 "왜 그런 남자가 취향이냐고……."라고 중얼거렸다. 

 

"여우짓, 귀엽잖아. 반전있으니까?"

"이해 못 하겠어. 유키치 군은 강아지계라서…."

 

미츠에의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알고 싶지 않는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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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코츠는 생각보다 빠르게 훈련소에 적응했다. 

옷코츠 뒤에 붙어 있던 특급 주령인 리카 탓에 말도 못 붙이고 그를 피하던 이들도 후시구로 남매의 노력 덕에 그를 피하지 않게 되었고, 이곳에선 아무도 그에게 괴물을 본다며 놀리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없었다. 좀 미심쩍어하던 이들도 얌전한 리카의 반응에 시간이 지나자 안심한 듯 옷코츠를 편하게 대했다. 

말이 훈련소지 그냥 자유분방한 느낌이라 상상했던 딱딱한 느낌은 없었다. 그 덕에 옷코츠도 조금 긴장했던 것을 풀어냈다. 체력을 늘리고 체술을 배우고 아이들과 대련도 해보고 옷코츠는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평화로움이란 감정을 느꼈고 행복이란 감정도 느꼈다. 리카가 죽은 뒤로 저주에 얽매여 살 때는 꿈꾸기 힘들던 것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타."

"치세 씨!"

 

옷코츠는 항상 수그리던 다니던 허리를 폈고 움츠리던 어깨를 폈다. 떨구고 다니던 고개를 올리고 불안함 가득하던 얼굴은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게 변한 옷코츠는 치세의 부탁으로 말을 놨다. 

 

"크레페 사러 나가자."

"크레페?"

"응. 나나코랑 미미코가 먹고 싶다고 했어."

"나도 가도 돼?"

"츠미키랑 메구미도 갈 거야. 그러니 유타도 가자."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말투였다. 

 

"바쁘면……."

"아니. 괜찮아. 근데 나나코랑 미미코가 누구야?"

"이번에 소개시켜 줄게."

 

이미 만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네. 치세는 전보다 나아진 옷코츠의 안색을 보며 안심했다. 

남자 둘, 여자 넷- 여섯 명은 도쿄 거리를 걸었다. 그들 손에는 각자가 원하는 토핑이 넣어진 크레페가 들려있었다.

 

"언니가 고른 토핑도 맛있네."

"가장 기본적인 걸 선택했으니 맛있는 게 당연하잖아."

"아! 너희들!"

 

자신의 크레페를 한 입씩 먹은 쌍둥이에 치세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곧 쌍둥이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자 눈썹을 찡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으로 변했다.

 

"……잘 따르네."

 

옷코츠가 말했다.

 

"그야 학대받던 중에 게토 씨와 치세짱에게 발견되어 보호되었거든."

"응?"

"훈련소에 있는 몇 명이랑 비슷한 케이스야. 그때 치세짱은 딱딱하게 굳어진 화난 얼굴로 비주술사에게 상해를 입혔대."

"상상이 잘 안 가네."

 

옷코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하지만 희뿌연 안개가 낀 듯 화난 얼굴의 치세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언니는 잘 화를 내지 않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무서워. 뭐 우리에겐 화를 내지 않지만. 상냥해서."

 

나나코가 말했다.

 

"하사바 씨."

"치세 씨는요?"

 

어느새 사라진 치세에 후시구로가 물었다.

 

"청소."

"어딥니까?"

"저쪽. 언니는 강해."

"압니다."

 

알고 있어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후시구로는 미미코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있는 골목으로 달려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갔을 땐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다. 

 

"늑대!! 히가시 중의!"

"도망쳐!"

 

치세가 아직 손 봐주지 못한 불량배들은 앓는 소리를 내는 제 친구들도 챙기지 않고 꽁짓빠져라 도망쳤다. 

 

"히가시 중 늑대?"

"아닙니다."

"메구미, 지역 짱이야?"

"그러니까 아니라고요."

 

후시구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반응이 오히려 더 맞다는 걸 말해주는 걸 아는 걸까? 치세는 킬킬 웃었다.

 

"아."

 

웃기느라 삥 뜯기고 있던 피해자를 깜박 잊었네.

 

"괜찮아?"

 

마스크를 한 남학생은 말을 하지 않고 치세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후시구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은 것 같네."

"……갓나물."

 

옅은 머리색을 지닌 그가 작은 목소리로 주먹밥 재료를 말했다.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치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천만에."

"……다시마?"

"어떻게 알았냐고? 감이야. 눈도 좋고 말이야."

"―언니!"

 

쌍둥이가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가봐야겠다. 조심해서 돌아가렴."

"연어."

 

치세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골목을 나갔다. 후시구로는 보디가드처럼 치세 옆에 섰다.

나온 김에 쇼핑도 하겠다면서 쌍둥이는 양쪽에서 팔짱을 껴서 츠미키를 데려갔다. 후시구로는 서점에 들르기로 해서 훈련소로 귀가하는 길은 치세랑 옷코츠 둘 뿐이었다. 

 

"미케츠가 잘해줘?"

 

미케츠는 옷코츠를 담당하고 있는 특급 여우 식신이다.

 

"응."

"다행이네."

 

옷코츠의 매칭은 계속 미케츠가 맡는 걸로 해야겠군.

 

"치세 씨는 슬슬 갈 거지? 교토……."

"응."

 

교토에 있는 -대표자는 츠쿠모 유키, 실무·운영은 라루가 맡고 있는- 훈련소도 보러 가야했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스다 씨가 형과 누나들에게 말하는 걸 들었어."

"아."

 

치세는 이해했다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힘낼게."

 

옷코츠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응. 할 수 있을 거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옷코츠 유타는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자손으로, 그 고죠 사토루의 먼 친척쯤 된다.

어린 여자아이(비주술사)를 저주해 특급 과주원령으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주력과 재능 그리고 센스를 가졌기에 리카가 해주된다 하더라고 옷코츠라면 금방 특급에 올라설 수 있겠지.

 

*

 

교토의 땅을 밟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 몸뚱아리 하나도 건사하기 벅찼던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일까?

 

"멍하니 있지 마."

 

함께 교토로 내려온 토우지가 어깨를 툭 치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러네."

 

아직 맘 놓을 땐 아니지. 상념에 빠지는 건 이 일이 끝난 다음에도 실컷 할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밥 먹을까?"

"네가 사는 거라면."

"선금 줬잖아."

"……."

"설마……!"

 

토우지는 치세의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확실해졌다. 이 자식, 또 날렸다고!

토우지는 도박운이 좋지 않았다. 가끔 대리도박하거나 심심풀이로 파칭코에 가는 센다이에 사는 누군가와 다르게.

 

"시꺼."

"……어쩔 수 없네. 가자."

"장어덮밥이 좋겠군."

"그래그래."

 

치세는 맛있는 식당을 찾아 인파 속을 걸었다. 

식사 후, 토우지와 헤어진 치세는 택시에 올라탔다. 교토 훈련소에 도착하자 그곳 훈련생들이 마중 나왔다. 그들은 치세를 격하게 반겼다.

 

"시스터! 오랜만이군!"

"어서 와, 치세."

 

특히 우락부락한 근육질한 남자들이 말이다.

츠쿠모 유키의 제자, 토도 아오이와 실무운영자, 라루의 포옹에서 풀려나자 치세는 분홍색이 감도는 브라운 머리색을 가진 남자아이와 시선이 부딪쳤다. 

 

"유키미츠."

"!!"

 

아이는 치세가 이름을 부르자 제 엄마의 치마자락을 놓고 그녀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치세는 익숙한 손길로 아이를 안아들었다. 점점 제 아빠를 닮아가는 조카, 이나미 유키미츠를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봤다. 

 

"더 무거워졌구나."

"헤헤. 얼마 전에 키가 컸다구!"

 

유키미츠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쭈욱 내밀었다. 

 

"있지, 치세~ 왜 날 안 보러 왔어? 나 기다렸다구? 엄마가 공부 열심히하면 치세가 온다구 했는데!"

"유키, 치세는 많이 바쁘다고 엄마가 그랬잖니. 어리광 부리면 못 써요."

"뿌―."

 

갈색 머리칼 여성, 이나미 미츠에가 따끔하게 말하자 유키미츠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치세는 안으로 들어가자는 고갯짓에 다들 안쪽으로 이동했다. 

 

"시스터, 대련을 하자."

"안 해."

"어째서냐!"

"에, 안 하는 거야? 치세 씨랑 토도 군의 대련?"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데."

 

훈련생들은 아쉽다듯 입맛을 쩝 다신 후 흩어졌다. 

 

"시즈요 씨는 식당에 있지?"

"응."

 

유키미츠의 보모기도 한 시즈요는 유키미츠가 술식을 발현하자 현재 교토 훈련소의 조리사로 일하게 되었다. 

포포와 페페의 안내를 따라 시즈요가 있는 식당으로 가는데 미츠에가 졸졸 따라왔다. 의아해진 치세가 물었다.

 

"공방은? 바쁘지 않아?"

"요즘은 바쁘지 않아."

"그래? 그거 다행이네."

"주구를 못 만들어서 시간이 널널한 게 다행인 일이야?"

"다행한 일이지. 곧 다시 바빠질 테니까."

"??"

 

미츠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치세는 물음에 답해주지 않고, 유키미츠를 안아든 채 식당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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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시끄럽다. 방문을 부실 것 같은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옥견!!"

"!!"

[유우우-타아아르을~ 괴롭히지~ 마아아!]

 

쾅. 소파에서 잠들어 있던 치세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살폈다.

 

"아이구야……."

 

뚫려진 벽……, 방의 참혹한 모습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리카짱! 진정해!"

 

그리고 한 남학생이 날뛰는 주령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엉망진창이네.

 

"리카, 그는 유타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정말?]

"물론이지. 날 믿고 물러나 줄래?"

[……알았어.]

 

치세는 옷코츠 유타에게 붙어 있는 주령, 오리모토 리카를 진정시킨 후 복도로 나갔다. 거기엔 벽의 잔해와 함께 후시구로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메구미, 괜찮아?"

"컥……. 저, 저 사람, 뭡니까?"

 

피를 토해낸 후시구로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새로운 훈련생인 옷코츠 유타야. 어제 늦은 밤 데려와서 오늘 소개시켜주려고 했어."

 

치세는 대답하면서 반전술식으로 후시구로를 치료했다.

야가 학장과의 면담이 끝나고 그를 발견했다.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주령를 알아차리자마자 식신을 붙였다. 

 

'사토루보다 많은 주력량…….'

 

그리고 어젯밤, 식신이 보내오는 신호에 치세는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움직였다. 

식신이 신호를 보내온 걸 보면 상태가 안 좋을 것이 분명했다.

 

"!"

 

아무도 없는 놀이터 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치세는 혀를 찼다. 주력이 불안정하게 날뛰고 있었다.

 

"안녕?"

"가까이…… 오지 마, 세요…… 당신도 다칠, 거예요."

 

똑같이 다치고 날 혐오하게 될 거예요. 작게 이어지는 뒷말에 치세가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불안과 공포에 떨리는 빛 하나 들지 않는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모순적이네. 오지 말라 하면서 눈은 누구보다 구해달라 외치고 있어, 너."

 

그렇다면 구해야지. 그게 일이니까.

 

'상태가 말이 아닌걸.'

 

퍼져나오는 많은 양의 주력을 보며 치세는 장막을 쳤다.

치세는 천천히 주력을 풀어 상대의 마구잡이로 날뛰는 주력을 억눌러갔다.

 

"저주받았구나, 너."

 

흠칫. 하얗게 질린 안색의 남학생이 화들짝 놀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랑 가자. 도와줄게. 너처럼 저주받은 아이들을 알고 있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조곤조곤 이어지는 달콤한 말에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와 같은……."

"그래. 너와 같은."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 치세가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리저리 날뛰며 퍼져 나가는 주력이 점차 줄어들었다. 완만한 반달을 그리는 눈꼬리와 함께 치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위로 휘어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폭주 때문인지 조금 멍해 보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은 그에게 치세는 다정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그 웃음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멍한 표정으로 내밀어 진 손에 그가 손을 얹었다. 얹어진 손을 꽉 잡으며 치세가 그를 일으켰다. 치세의 손안에 붙잡힌 손이 움찔거렸다.

 

"이름이 뭐야?"

"옷코츠…… 유타, 입니다."

"그래. 나는 사카즈키 치세. 편한 대로 불러. 저 애는 이름이 어떻게 되니?"

 

한껏 경계심을 보이는 주령을 보며 물었다.

 

"리카예요. 오리모토 리카요."

 

옷코츠 유타의 애원 탓인지 죽일 듯이 살기만 피우고 직접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소리네. 뭐 특급이니 당연하겠지만.

 

"리카짱이 보이시나 보네요."

"주술사니까. 그리고 이젠 너도 주술사야. 너와 같이 저주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주술사라고 부르거든."

"주술사……."

 

주술사라는 단어가 어색한 듯 입 안에 넣고 굴리는 옷코츠를 보며 치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특급 주술사 싹이라 상당히 기대된다. 얼마나 성장해주려나.

 

'리카는 정말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네. 이 정도 존재감이니 다른 주력을 감지 못하지. 옷코츠가 주술사 재능을 가지고도 주령을 감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

 

옷코츠 유타는 저주받았다.

2010년, 6년 전 어린 나이에 차에 치여 눈앞에서 죽었던 오리모토 리카는 특급 과주원령이 되어 옷코츠에게 들러붙었다. 

풋내나는 첫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이 되었다.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지만 실제는 호러물이다(애초에 켄토 말처럼 주술사는 인생이 빌어먹을 호러물이지만).

 

'기구하네, 주술사답게.'

 

주령이 된 리카는 난폭했고 그 공격 대상은 여성, 연상의 남자, 그리고 옷코츠에게 적대적인 것 모두였다.

옷코츠가 해치고 싶지 않아도 그 셋에 해당하는 모두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 피해자는 점점 늘어났다. 

저 대상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는 것보다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쉬우니까.

그 탓에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는데다 친구도 사귈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은 예삿일. 리카가 그 가해자를 응징하고 그는 더 고립되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어디로 보든 이건 명명백백한 저주였다.

악순환의 고리를 강화시키고 대상을 고립시키는 저주.

 

"그렇다면 전 리카짱을 해주하고 싶어요."

 

옷코츠의 말에 치세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옷코츠가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가 말을 꺼냈다.

 

"……리카짱 때문에 주변에 피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해요."

"넌?"

"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넌 어쩌고 싶니? 네가 원하는 건 뭐야?"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가 옷코츠 유타를 담아냈다. 그 시선에 옷코츠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전…… 평범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가족과 지내고 친구도 사귀고……."

"흐음."

 

쉬운 일이지만 주술사로서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특급이 될 게 뻔한 강자라서, 가만 안 놔둘 테니까.

 

"어려울까요……?"

"아니, 할 수 있어. 다만 네가 좀 강해져야겠지. 지금보다는."

 

자신이 도와줄 테니 걱정 말라며 한쪽 눈을 찡긋한 치세가 말했다.

 

"우선 리카 좀 꺼내볼래?"

"여기서요?"

"괜찮아. 근처에 사람 다 치웠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던 옷코츠가 치세의 자신에 찬 미소에 눈을 질끈 감으며 리카를 불렀다.

 

"리카짱."

[유우타아―!]

 

주령 특유의 늘어진 목소리가 넓은 공터를 울렸다. 반쯤 고장 난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불안정하고 기괴해진 음악 같았다. 본신을 현현한 게 아닌 반쯤만 보이는 그 흐릿한 형상임에도 존재감이 어마어마해서 치세가 입매를 느슨히 올리며 눈을 둥글게 휘었다. 

 

"역시 특급이라는 건가."

 

특급 과주원령임을 뽐내듯 압도적인 위압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치세가 가볍게 흘려내자 그 압박감이 더 진해졌다.

 

"안녕, 네가 리카지?"

[너, 너어는- 뭐야……?! 유우타한테, 서어 떨어져어-!]

 

본능적으로 치세가 위험한 존재임을 알아챈 걸까 리카가 적의를 강하게 드러냈다. 강자가 강자를 알아보듯 리카는 단번에 치세가 자신을 위협할만한 강자임을 알아챘다.

 

[아, 아- 죽일거야?!]

 

그저 웃고만 있는 치세의 모습에 목소리를 한 톤 올린 리카가 소리쳤다. 옷코츠가 어쩔 줄 모르며 허둥지둥거리자 치세는 웃으며 그에게 진정하라 손짓했다.

 

"날 죽이게?"

 

치세가 콧소리를 내며 씩 웃었다.

특급 주령의 살기에 눈 하나 깜짝 않으며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에 오히려 옷코츠가 식은땀을 흘렸다. 주술사는 원래 겁이 없는 걸까? 옷코츠의 머릿속에선 주술사는 안전불감증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이들이 되어버렸다.

 

"리카는 옷코츠를 정말 좋아하네."

 

능청스레 웃으며 말하는 치세에 장막 안에 매섭게 맴돌던 살기가 한순간에 훅 사라졌다.

 

[어어-?]

 

조금 어리둥절해 보이는 리카가 하악질 하는 고양이마냥 잔득 부풀렸던 덩치를 줄였다.

 

"아니, 사랑하는 건가?"

[마앚아아- 리카, 느은. 유우타를 사랑해-!]

"멋지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알아. 그 사람만 봐도 행복하고 어떤 보물보다 귀하고 소중하지?"

[으응, 유타 좋아. 보물 같아.]

"맞아맞아. 옆에서 지켜주고 싶고."

[리-카가 유타 지켜어~!]

"멋지네."

 

어느 새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치세와 리카의 모습에 옷코츠만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럼 결혼하기로 약속한 거네."

[리카! 유우타랑 결혼!]

"로맨틱한걸."

 

주술사답게 딱히 정상인은 아닌 치세가 활짝 웃었다.

꺄르륵 웃으며 사랑 이야기에 빠진 둘은 꼭 10대 소녀 같았다. 

 

"거봐, 괜찮지? 이래 봬도 난 좀 능력 있어?"

"신기하네요……. 리카짱이 저를 제외하고 이렇게 호의적으로 구는 사람은 처음 봐요."

 

어떨떨한 목소리로 옷코츠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니 주령이나 어떤 면에서는 비슷해. 주령은 감정이 훨씬 적어지고 좀 맹목적이게 되는 것뿐이니까."

 

옷코츠는 치세의 미소가 번져있는 얼굴을 응시했다. 곱게 흰 눈꼬리를, 바람에 작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살짝 찡그려 주름이 그려진 오똑한 콧대를, 도자기 인형처럼 하얀 뺨을,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를, 그 아래로 보이는 고른 치열을. 하나하나 곱씹듯 차례차례 눈으로 훑었다. 제 인생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행운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서였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뭔지 아니?"

"잘 모르겠어요."

"'인정'이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덤덤했고 표정은 무언가를 회상하듯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는 듯 모호했다.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다는 게 그 사람을 그렇게 기쁘게 만들고 맹목적이게 만들어. 리카에게 필요했던 건 그런 걸지도 모르지."

"인정……."

"물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방법이 안 통했겠지만. 이걸 하는 상대가 나 아니었으면 그냥 죽었을걸?"

 

해맑게 말하는 치세의 모습에 옷코츠는 울상을 짓다가도 눈을 내리깔며 인정했다. 

 

"사카즈키 씨."

"응."

"……고마워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래. 근데 말 놔도 되는데."

 

제게로 닿는 온정적인 시선에 옷코츠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떨구고 싶어졌다.

 

*

 

후시구로 남매에게 옷코츠는 훈련소 안내를 받았다. 

 

"주술계에 대해서는 아는 거 있어?"

"아니……."

"좋네요. 이상하게 알고 있는 것보단 백지가 차라리 낫죠."

 

옷코츠가 시선을 떨구자 츠미키가 허리 펴라며 등을 팡팡 두드렸다.

 

"훈련소의 선생님이 지식이나 체술을 알려주실 거야. 치세짱도 체술을 봐줄 거지만 바빠서 대부분은 다른 애들이랑 대련하는 걸로 실력을 키울 거야."

"사카즈키 씨는 많이 바쁘나 보네."

"치세 씨는 특급이니까요."

"특급?"

"엄청 강하다는 소리야."

"그렇구나."

 

그럴 것 같았다며 옷코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축 처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츠미키가 얘도 치세짱 팬인가 고민했다. 팬이면 다행인데 괜히 쓸데없이 연정 같은 걸 품는 쪽이면 나중에 두 특급-고죠 사토루, 게토 스구루-에 의해 억지로 정리 당할 테니까. 딱히 상관은 없지만 치세짱이 마음에 들어한 애니까 걱정은 좀 됐다. 알아서 하겠지만.

 

"애들이랑 대련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꽤 오를 거야."

 

츠미키가 잔잔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 훈련소에선 각자의 재능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이게 새로운 신입생이냥?"

"주인이 말한 놈이지왕?"

"!!"

 

옷코츠는 눈앞에서 나타난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하는 것에 눈을 부릅 떴다.

 

"이 식신들이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야."

"식신?"

"앗, 이거 말 안 했나? 치세짱은 식신을 조형할 수 있거든. 제한이 없어서 얼마든 만들 수 있어. 그걸 다른 주술사와 싹이 보이는 아이들을 위해서 쓰는 중이고."

"식신은 정확히 어떤 거야?"

"치세 씨의 주력으로 만들어져서 그녀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급에 따라서 제한이 되긴 하지만."

"각자의 자아가 있고 능력도 있어서 그냥 일반 주술사와 다를 바 없어. 주로 친근한 동물의 겉모습을 취하고 있어. 개나 고양이 같은."

 

들뜬 얼굴로 치세에 대해 조잘조잘 말하는 후시구로 남매에 옷코츠가 중간중간 맞장구 쳐주며 반응했다.

 

"시설이 많네. 시청각실까지…."

"옷코츠 씨는 여기서 특급 과주원령을 다루는 법이나 해주 하는 방법, 체술 훈련을 할 겁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가 되면 주술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고등학교로 갈 거고, 치세 씨의 후배가 되겠죠."

"사카즈키 씨, 학생이구나…. 그런데…, 대단하네."

"주술계의 구원자라는 게 괜히 나온 게 아니거든."

 

츠미키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짓다 우울한 표정은 금방 지우고 다시 밝게 돌아왔다. 

 

"그래서 난 열심히 노력해서 그 옆에 설 거야. 치세짱이 지고 있는 짐들을 나도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멋지네."

 

옷코츠는 탄성을 뱉듯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반짝이는 츠미키의 눈에 바위처럼 단단한 의지가 비쳐 보이는 게 멋져서 옷코츠는 조금 동경을 담아 바라봤다. 

 

"옷코츠 씨도 노력해줘야줘."

 

후시구로가 말했다.

 

"어?"

"당신도 치세 씨의 옆에 서고 싶은 게 아닙니까? 치세 씨가 직접 데려왔으니 분명 그럴 텐데요."

"……맞아, 나도 그러고 싶어."

"당신은 재능이 있으니 옆에서 일할 기회가 생길지 모릅니다. 고죠 씨랑 게토 씨처럼."

"아버지는 빼는 거야?"

"그 인간은."

 

질색하는 후시구로에 츠미키가 키득 웃었다.

 

"경쟁자가 엄청 많긴 하지만 우리 힘내자!"

"응!"

"그 누구에게도 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있는 공간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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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가 갈색 봉투를 내밀자, 토우지는 망설임 따위 없는 손길로 뜯었다.

 

"이게 뭐야? 불법 암시장?"

"그래. 목록에 적힌 물품들을 전부 가져와줘. 사도 되고, 훔쳐도 되고, 아니면 불법 시장이니 철저하게 부셔도 되고. 방식은 토우지 맘대로 해."

"장부까지? 뭘 꾸밀 생각이야?"

"재기불능으로 밟을 생각."

 

치세의 보랏빛 안광이 번득였다.

 

"누군지 몰라도 네 눈밖에 나다니, 꽤나 비참한 꼴이 되겠구나."

 

토우지는 관심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고죠와 게토가 방으로 들어오자 곧 스다는 차를 세팅한 후 자리를 비켜줬다. 정확히는 치세가 부탁한 걸 조사하러 나간 거였다.

 

"학장님에게 들었는데, 도쿄 주술고전에 입학하기로 했다면서?"

"그럼 내 학생이 되는 거네!"

 

게토의 말에 치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죠가 달콤한 목소리로 기뻐했다.

 

"이제 우리들 곁을 떠나지 마."

 

소파에 누워 있던 고죠가 치세의 허리에 매달려서 어리광을 피웠다. 성인 남성이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소녀의 품에서 어리광을 피우는 건 미관상 안 좋았지만, 고죠의 훤칠한 외모가 그걸 전부 없애버렸다.

 

"그것보다 사토루, 이제 '나僕'라고 말하네."

 

원래 고죠 도련님은 깔보듯이 오만하게 '나俺'라고 말했는데.

 

"후훗, 열심히 교정했다구! 칭찬해줘!"

"그래그래. 잘했어."

 

치세는 개를 칭찬하듯 고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구루도, 칭찬해줄게. 교정하느라 수고했어."

 

또 다른 손으로 게토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살짝 숙여줬다.

 

"그동안 뭐했어?"

 

치세는 성인 남성 둘이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만지작거리는 기행을 무시한 채 차를 호로록 마셨다. 토우지는 어이없다듯 봤다.

 

"교복? 그동안 원숭이 사회에서 지낸 건가."

 

소파 등받이에 걸린 교복을 보고 게토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비주술사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치세는 비주술사를 원숭이라고 부르는 걸 듣기 싫었다.

 

"이런, 실언했네. 치세짱은 원숭이에게도 상냥하다니까."

 

방금 주의를 주었는데도 다시 원숭이라고 말하는 게토였다. 저건 분명 고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치세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 앞에서만이라도 주의해줘, 스구루."

"뭐 노력해볼게. 하지만 원숭이를 원숭이라고 부르는……."

"스구루."

 

게토는 혀를 찼다.

 

"그래서 뭐했는데? 뭐했길래 7년 동안 잠수탄 거야?"

 

고죠가 분위기를 환기시듯 물었다. 

 

"딱히 잠수탄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고전에서 내려오는 임무는 했으니까."

"우리랑 만난 적이 없으니 잠수한 거 맞아. 그래서?"

"육아했어."

 

치세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신체가 옭아매졌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고죠가 어깨를,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은 게토가 손목을 구속했다.

 

"아픈데."

 

남자들의 분노 어린 손아귀에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치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그 자식 아이지. 없애 버리겠어."

 

어깨에 쥔 고죠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이 반지의 주인을……, 그때 죽여야 했었는데."

 

게토는 치세의 왼손 새끼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를 원수처럼 노려봤다.

뒤숭숭한 말을 하는 두 사람의 동공은 빛 하나 없는 어둠처럼 섬뜩했다. 그래봤자 눈동자를 빤히 보고있는 치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왜 사고방식이 그쪽으로 흐를까? 내 애 아니야."

 

치세가 말했다. 그러자 위협적인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두 사람의 어두운 동공에 이지理智의 빛이 들어왔다.

 

"조카야."

"아."

"미안미안."

 

신체를 옭아맸던 힘이 풀렸다.

 

"그 시스콤의 자식인가."

 

토우지가 물었다.

 

"응. 유키치의 핏줄이야."

 

치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렘이 가득한 그녀의 미소가 방 안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카모가 파티에서 소개할 거야. 너희는 참석해? 토우지는 의뢰 때문에 불참이겠지만."

 

불법 암시장과 카모 주최 파티가 같은 날이다.

 

"물론 가야지!"

"유키치의 아들을 만나는 게 기대되네."

 

고죠와 게토도 참가하면, 특급 4명이 전부 모이게 되는 건가. 잘 됐군. 치세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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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주술사, 게토가 대표로 있는 시설-운영은 비서, 스다 마나미가 맡고 있다.-은 주변에 비주술사만 있는 환경에서 도태되어 갈 곳 잃은 어린 주술사를 보호 및 육성하는 훈련소다.

어릴 때 사건에 휘말려 주령이 보이게 된 후시구로 츠미키 역시 시설에서 주령과 주술에 관한 지식를 배우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훈련했다. 하지만 보이기만 할 뿐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치세짱은 위험한 싸움을 하고 있겠지……. 하아……."

 

너무 멀다. 동경하는 사람과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옆에 서고 싶은데…….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해야 한다왕!"

"난 스다에게 가겠다냥! 넌 쌍둥이에게, 알겠냐냥!"

 

인간 말을 하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블레이저 교복을 입은 포니테일 여학생이 서 있는 복도를 바쁘게 달려 나갔다.

인간 말하는 펫을 보고도 기겁하지 않는 -익숙했기 때문에- 츠미키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포포, 페페?"

 

강아지 식신, 포포랑 고양이 식신, 페페는 어린 주술사에게 기본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지금은 시설에서 지내고 있지만 가르쳐야 할 학생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지 분신들을 보냈다. 귀엽고 작지만 주인(치세)을 닮아서 강했다. 

 

"주인이 온다냥. 비비가 그렇게 말했다냥!"

 

비비는 올빼미 식신인데, 치세의 식신 중에서 유일하게 전령새 역할을 했다.

지난 8년 동안 치세는 주술계 누구와도 대면하지 않고 식신, 비비를 통해서만 임무를 받았다. 그 임무가 대면하는 임무라면 전부 거절해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나 철통방어를 했는지 주술협회 누구도 치세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임무 완수와 보고서 제출을 꼬박꼬박 하니까 생존하고 있다고 파악했을 뿐이다.

 

"이곳에 용무가 있는 모양이다왕."

"에?!"

 

자신의 정보를 통제하던 치세가 시설(훈련소)에 오겠다는 말을 전했다.

 

"치세짱이 온다니……, 왠지 믿기지 않아……."

 

반쯤 얼이 나갔던 츠미키가 정신을 차린 후 현관으로 나가자, 때마침 저쪽에서부터 걸어오는 분홍머리 여학생이 있었다. 이마에 붉은 꽃(화전花鈿) 문신이 있는 그녀는 마중 나온 사람들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보라색 눈이 갸름하게 접히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치, 세, 짱……."

""언니!""

"잘 지냈어, 모두들? 건강해 보이네!"

 

헤어졌을 때와 다르게 지금 치세는 밟게 웃고 있다. 걱정 한시름을 덜어낸 츠미키는 곧 눈물을 쏟아내더니 엉엉 울었다.

 

"에? 츠미키? 왜 우는 거야? 아~ 울지 마! 내가 울린 것 같잖아."

"언니가 울린 게 맞거든요!"

"엑?!"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저희가 얼마나……!"

 

검은 단발머리 여학생과 당고머리를 한 갸루계 여학생이 울먹거렸다.

 

"흐윽……!"

"아니, 왜 너희까지 우는 건데……."

 

눈물은 전염성이라도 있는 걸까? 하사바 쌍둥이, 미미코와 나나코까지 울어버리자 치세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한동안 그곳에선 소녀들의 오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츠미키와 쌍둥이들이 꾀죄죄한 얼굴을 씻으러 가자, 치세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축축하게 젖은 교복 상의를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스다가 손님들을 위해 차를 준비하러 방을 나간 후 치세는 교복을 벗었다.

 

"연락 넣었으니까……."

 

금방 이쪽으로 오겠지? 그들을 직접 얼굴 맞대는 건 7년 아니, 약 8년 만인가. 

 

""치세(씨)!!!""

""치세짱!!!""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예상외로 빠르게 온 그들에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들이닥친 불청객들은 흰 와이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치세에 돌처럼 굳어졌다. 단추를 다 잠그지 않아서 벌어진 그 사이로 커다랗고 뽀얀 가슴이 보였다.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을 무시한 채 치세가 바지를 입었다. 가는 흰 다리가 검은 정장 바지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치세가 정장으로 갈아입자 그녀의 육감적 몸매가 잘 드러났다. 

 

"가슴에 있던 붉은 자국…… 그거 키스마크, 맞지?"

 

입가에 상처가 난 남자, 후시구로 토우지가 물었다.

 

"흐응~ 프로 제비 눈은 속일 수 없나 보네."

 

치세가 싱긋 웃었다. 그건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안 본 사이에 요호妖狐가 다 되었군."

 

토우지를 제외한 불청객 셋이 후다닥 자리를 떴다. 그것에 토우지가 "자중해라. 애송이들 심장을 떨굴 일 있냐."라고 덧붙이자 치세는 깔깔 웃었다.

 

"애송이'들'이라니. 메구미는 그렇다 쳐도……. 사토루랑 스구루는 아니잖아."

 

과거에 붉은 단풍잎을 달았던 둘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토우지. 너에게 의뢰하고 싶어."

"의뢰?"

"응. 그러려고 교토에 가기 전에 도쿄에 온 거거든."

 

거부는 받지 않는다는 그 오만한 얼굴에 토우지는 방에 있는 소파로 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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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계는 지옥이다.

마의 소굴이랄까, 지옥이란 단어가 걸맞은 곳이다.

턱도 없는 인력에, 이익만 꾀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사람들이 범람하는 곳.

유감스럽게도 그런 주술계와 '사카즈키 치세'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였다.

그녀가 태어난 2001년 3월 13일, 하늘이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1989년 12월 7일처럼 세계의 흐름을 바꿀 강자의 등장이라는 걸 예민한 술사라면 전부 알았다.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겠구나. 주술사든 주저사든 비주술사들이 눈이 벌겋게 되도록 찾겠지. 천호 쿠루리의 구슬을 갖고 태어났으니……."

 

천호 쿠루리의 구슬.

특급 주물이라고 불리지만 쓸 수 있는 사용자만 있다면 '기적을 선사하는 특급 주구'가 될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파장이 맞는 존재는 거의 없다.

 

"게다가 품고 있는 주력량이라면 상전술식을 계승하고 있을지도."

 

갓난아기를 품에 안아든 여성은 각오 어린 눈빛을 했다. 

그녀는 태어난 아이의 평온을 위해 숨기로 결정한다.

이나미 가문과 절연한 유메미테는 자식들을 데리고 빠르게 숨었다.

주술협회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 한발 늦었다.

한 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술계는 비범한 힘을 갖은 그 아이를 갖기 위해 전국을 뒤적거렸다.

 

*

 

세월은 흘러 흘러─ 2016년.

 

"치세 누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스트로베리 금발의 세라복 여학생의 고개가 움직였다.

교복(가쿠란) 재킷 아래 후드티를 입은 분홍색 머리칼 남학생이 한쪽 팔을 높이 들어서 붕붕 흔들고 있었다.

 

"이타도리다."

"이타도리?"

"아, 저 애가 그 니시 중의 호랑이?"

 

그녀는 에워싼 학생들 무리에서 벗어나 그의 앞에 섰다.

 

"유지."

 

올곧은 한 쌍의 호박에 치세의 자수정 눈동자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호, 호, 혹시 연인? 사카즈키 선배의 저런 눈빛은 처음 봤다!"

"설마! 사카즈키 선배는 전교생에게 친절하잖아."

"아니, 누나라고 불렀으면 동생이잖아?"

"동생이라고 하기엔 두 사람 성이 다르잖아!"

 

학생들은 교문을 빠져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카즈키 치세와 이타도리 유지는 이웃사촌으로 소꿉친구다.

지금까지 쭈욱 함께 있었다. 다만…….

 

"꼭 가야 하는 거야?"

"그쪽 학교와 약속이 잡혀있으니까. 약속 안 지키면 나쁜 거야."

"우우……."

 

추운 2월, 센다이역까지 배웅하러 온 유지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유지?"

"누나는 그 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거지?"

"그렇지. 전교생 기숙사 입주제인 종교계 학교니까."

 

설마, 이 반응은!!

 

"나랑 떨어지는 게 쓸쓸한 거구나! 귀여워!"

 

치세는 이타도리를 꽉 끌어안았다. "귀여워! 귀여워! 너무 귀여워!"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좀, 누나! 난 귀여운 게 아니라고!"

 

치세는 기차가 곧 떠난다는 방송이 울릴 때까지 이타도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다녀올게, 유지!"

"……응."

"며칠동안 비우게 될 집을 부탁할게."

"맡겨줘! 그래도…, 역시 쓸쓸하네. 초등학교, 중학교 같은 곳에 나왔는데 고등학교에서 갈라지니…."

 

이타도리가 쓸쓸한 미소를 짓자 치세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

 

씁쓸한 얼굴은 금방 사라지고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누, 누누, 누누누, 누나나나?!!!!"

"그렇지 않을 거야. 우린 다시 같은 고교에 다니게 될 거야."

"에?"

 

지금은 이해할 필요가 없지.

 

"갔다 올게."

"같은 고교에 다닌다니, 무슨 소리야?! 누나!!"

 

자세한 설명을 피한 치세가 올라타자마자 신칸센이 출발했다.

 

"그거야, 유지 넌 나랑 같은 존재니까."

 

기차 외·내부에는 투명한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나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 눈에 보이지 않는지 누구도 그 나비 떼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치세가 창조한 나비들은 그녀에게 전국에서 수집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니 같이 다니게 될 거야, 주술고전에."

 

주술고등전문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비 주술사 양성 학교-전국에서 단 두 곳, 도쿄와 교토에만 있다.-로, 4년제 교육만 아니라 졸업 후 주술사 혹은 주술고전 관계자의 거점으로 활동되며 임무의 알선과 서포트도 행하고 있다.

원래 주술고전은 4년제가 아니라 5년제였다고 한다. 하지만 주술사라고 하는 직업상 자신을 돌볼 유예기간이 필수적이라 5년제의 최후 1년은 자유롭게 지내게 하는데. 이때 주술사를 그만두는 일도 적지 않아서 '이 최후의 1년은 필요 없지 않나?'라는 생각에 4년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4년제 졸업 후 주술사로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1년 동안 휴식기를 가지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주술고전의 학생은 입학과 동시에 임무도 할당받는다. 아무리 주술계가 죽음과 가까운 직업이라지만 주령의 등급과 학생의 등급이 매번 같은 건 아니다. 조사가 잘못되어 등급에 실수가 있는 예도 있고 또 보조감독들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도 있거니와 주령의 등급이 낮더라도 지성이 있는 경우엔 예상외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학생이 사지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이들이 자라기 전에 죽어가니 안 그래도 부족한 주술사의 숫자가 더 줄어들어 주술계는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는 그런 꼴, 보고 싶지 않아.'

 

치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편, 도쿄 주술고전의 교직원실에서 두 남성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좋은 소식?"

"그래. 카모에서 주최하는 교류 파티야."

"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야? 어차피 그쪽 상전술식 보유자가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고 자랑할 생각 만만이잖아."

 

고죠는 신랄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런 목적이겠지만 치세짱이 참가한대. 금년도 입학생 환영 파티를 겸한다니까 '꼭' 참가하겠다고 (주최측에서 자랑하듯) 말하더군."

"에?"

 

기우뚱, 고죠를 태운 의자가 균형을 잃고 미끄러진다.

쿠당탕. 게토는 의자와 함께 바닥을 구른 제 친우를 한심스럽게 보았다.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승낙한 적 없으면서. 왜 카모만?"

"카모가의 차기 후계자가, 노리토시였던가? 그는 첩의 자식치곤 꽤 빠르게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지."

"뒤에서 치세짱이 도왔다?"

"아마도. 하지만 왜 도왔는지 모르겠다 말이야. 치사짱은 거의 등가교환으로 움직이잖아?"

"그건, 치세짱을 만나면 알게 되겠지. 8년 만의 재회네."

 

두 남성은 꿍꿍이 가득한 미소 띤 얼굴로 임무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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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어머니, 천호 쿠루리(九瑜璃)'의 구슬이라 불리는 특급 주물을 몸속에 품고 태어난 반인반주半人半呪, 사카즈키 치세(朔月 智世)에게는 여러 개의 수식어가 붙어있다.

―최연소 특급 주술사.

―죽어가는 사람도 순식간에 치료한다는 인외의 힐러.

―일본 전역에 식신을 퍼트려 자신의 눈과 귀가 전국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력양 많은 최강자.

―주구 수집가 & 주구사 후원자.

―주술계의 어린 선생님(구원자).

―주술계 명문가 몇 개나 반파시킨 돌아이.

―보수파의 눈엣가시.

―언제 이성을 잃고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위험물).

―인간인 척하는 괴물 여우 그릇.

―고삼가(고죠, 젠인, 카모)의 비공식적 예비 안주인.

―킬러 천여주박의 제자.

 

2018년 6월, 새로운 수식어가 하나 더 생겼다.

―'저주의 왕, 양면 스쿠나의 수육체=그릇, 이타도리 유지의 사형집행인.'

 

성묘하는 이타도리를 멀찍한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삐죽삐죽한 성게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발 남학생, 후시구로 메구미가 치세에게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응? 뭐가?"

"이타도리 말입니다."

"아. 문제없어."

 

치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잔잔한 그대로였다.

 

"꽤 아끼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아껴. 동생이니까. 그래서 유지의 마지막 숨결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후시구로는 소유욕이 드러나는 치세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뭐야?! 질투나!"

"그러네. 신기하네."

 

등 뒤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제야 온 건가. 늦었다고.'

 

몸을 빙글 돌자 새까만 복장의 수상쩍어 보이는 남성 2인조가 있었다. 

 

"꽃다발은? 설마 안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가져왔지! 누구의 부탁인데!"

 

눈가리개를 한 백발의 남성이 말했다.

 

"어울리는 꽃다발을 고르는데 애 좀 먹었지만."

 

경단 머리의 장발 남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헌화獻花라고 말했을 텐데요."

 

후시구로는 둘의 손에 들린 꽃다발의 화려함에 질린 얼굴을 했다.

 

"그것보다, 누구에게 줄 거야?"

"와스케 씨한테."

 

사카즈키 묘에도 올려놔야지. 

 

"와스케가누구야?"

"유지네 할아버지."

"유지는 또 누구?"

"내 사형수."

"아~ 치세짱이 머리 굳은 노인네들에게서 머리 숙여가며 집행유예를 받게 노력한 아이구나."

 

경단 머리의 남성, 게토가 말했다. 담담한 어조와 다르게 말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상층부에게 머리 숙인 적 없지만……. 대충 의미가 비슷하니, 뭐 됐나."

 

게토가 비주술사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대충 흘러 넘겼다. 덧붙여서 이타도리의 친화력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저기 핑크머리가 양면 스쿠나의 손가락 20개를 먹어야 하는 1학년 편입생, 이타도리 유지야."

"진짜로 섞여있네, 웃겨라."

 

백발, 고죠는 치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였고 곧 경박하게 웃었다. 하지만 경박한 언동 아래서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을 거다.

 

"그는 바보 같은 호인에다가 치세 선배처럼 선인입니다. 신체능력은 젠인 선배 같고요."

 

후시구로가 이타도리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서, 이타도리가 합류할 때까지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누나!"

"성묘는 잘 끝났니?"

"오! 근데…… 누구야?"

 

이타도리의 눈동자가 새로운 얼굴들 쪽으로 향했다.

 

"둘은 네가 앞으로 다닐 도쿄 주술전문고등학교의 선생님이야. 백발이 '고죠' 선생님이고 흑발이 '게토' 선생님."

"선생님? 에?"

 

경악스러운 그 마음 잘 이해된다. 왜냐면 고죠랑 게토는 절대로 선생님으로 보이지 않거든.

 

"진짜?"

""진짜.""

 

치세와 후시구로가 합창했다.

 

"그럼 나도 성묘하고 올 테니까, 잠깐 대화하고 있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도록 해."

 

화려한 꽃다발을 손에 든 치세는 그 자리에 두 어른과 남학생 둘을 남겨버리고 성묘하러 가 버렸다. 

 

"그니까, 유우지? 난 1학년 담당, 고죠 사토루. 이쪽은 2학년 담당인 게토 스구루."

"이타도리 유지입니다! 이상형은 제니퍼 로렌스! 잘 부탁드립니다!"

 

이타도리가 두 어른에게 허리 숙여 꾸벅 인사했다.

 

"음. 인사성이 밝네. 이쪽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성善性이야."

"나랑 잘 맞을 것 같아."

"다행이네."

"그치~? 1학년은 3명밖에 없으니까 한 명이라도 맞는 아이가 있는 편이 좋지."

"겨우 셋?! 한 학년에 3명은 너무 적지 않아?"

"넌 주술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아니."

"그만큼 주술사는 수가 적어."

 

후시구로가 말했다.

 

"음, 있지, 선생님들은 강해?"

 

이타도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응. 우리들 최강이니까."

"5명밖에 없는 특급이니까 웬만한 주술사보다 강하지."

 

고죠는 자랑스럽게, 게토는 담담히 말했다.

 

"그럼 치세 누나보다 더 강해?"

"순수 체술이라면 지겠지만 술식을 사용하면 이기는 것은 나야."

 

헌화하고 돌아온 치세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과 귓가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타도리는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노, 놀랬잖아, 누나!"

"양면 스쿠나와 천호 쿠루리는 불구대천 관계야. 즉 내가 특급이 아니었어도 네 사형집행인은 변함없이 나일 거야. 양면 스쿠나와 천호 쿠루리가 함께 죽는다면 기뻐할 테니까, 윗선들은."

 

이타도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본 치세가 풋 하고 작게 웃었다.

 

"뭐야, 나랑 함께 하는 지옥은 싫어? 난 유지랑 함께 할 지옥이 무척이나 즐거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나 누나랑 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어서 기쁜걸!"

"그럼 됐잖아.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마. 자 가자!!"

 

치세는 기운차게 외친 후 힘차게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휘청거렸다. 

후시구로가 빠르게 치세를 부축했다.

 

"조심하세요."

"아. 쌩큐."

"이에이리 선생님에게……."

"괜찮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타인을 치료할 수 있는 반전술식을 지닌 여의사, 이에이리 쇼코를 만날 정도까지는 아니다. 단지 피로가 많이 쌓인 것이니까. 

 

"안 됩니다. 츠미키가 걱정합니다."

"맞어. 이러다가 쓰러지면 쌍둥이들이 울지도 몰라."

"응응. 나나미랑 하이바라도 걱정할 거야."

"그거, 치사하지 않아?"

 

이쪽이 그들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지.

치세는 남자들의 압력에 져서 주술고전에 도착하면 의무실로 향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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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으로 한 사람은 평생 장애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고, 또 한 명은 의식불명으로 혼수상태다.

학교가 떠들썩하게 난리가 나도 모자란 상황이었지만 정작 가해자들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보호자가 사태가 커지길 원하지 않는다며 변호사를 보내 최대한 원만하고 조용히 처리하자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죄책감은커녕 손놓고 나몰라 하는 감독.

어떻게든 사태를 덮으려고 혈안이 된 교장.

가식적으로 걱정하는 척하며 정작 본인에게 불똥이 튈까 쉬쉬하며 외면하는 교사들.

조카가 다쳤다는데도 얼굴하나 비추지 않는 피해자 보호자가 보낸 돈만 밝히는 변호사.

제 아이들이 그럴 리 없다며 피해자를 욕하는 가해자 부모들.

 

“엿 같네.”

 

조사받은 종이를 보던 흑발의 청년이 이를 갈았다. 동시에 손에 들려있던 종이가 와그작 구겨졌다.

 

“조카가 다쳤는데 이따위로 했다, 이거지.”

“이제 동생들을 되찾을 수 있는 거지?”

“당연한 소릴. 그리고 이 사태를 만든 원흉도 만나러 가야지.”

“원흉?”

“배구부 전 주장인데, 토비오가 1학년일 때 따돌린 것 같아. 물론 토비오는 멍청하니까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미친. 상하관계 뚜렷한 운동부에서 주장이란 자가 어린 후배를 따돌렸으니 그 분위가 퍼지는 건 한순간일 텐데!”

 

주장의 무시, 부주장의 방치, 부원들의 외면과 시기어린 질투로 가득한 분위기 속에 천재는 고독해졌고, 결국엔…….

 

“그래서 저렇게 된 거야?!!”

“오빠! 꼭 한 대 갈겨줘!”

“한 대면 돼?”

“직접적인 원흉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만들었으니까, 눈탱이 밤탱이 눈으로 만들어줘.”

“그래.”

 

옆에 있던 갈색머리 미소녀들의 분노에 청년은 다시 한 번 더 다짐했다. 그 뒤로 바쁘게 움직였다.

 

*

 

키타가와 제1중학교 교문 앞에서는 기자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약발 장난 아닌데.”

 

모여 있는 카메라를 멀리서 보며 캡모자를 쓰고 있던 흑발의 청년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기자들을 뒤로 했다.

 

“동생들이 여기까지 도와 줄은 몰랐는데.”

 

연예계에 속해있는 셋 쌍둥이 동생들이 은퇴 선언을 하자, 소속사에선 “동생들의 건강 악화”를 이유를 들었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친했던 기자들에게 동생들이 다니고 있는 중학교를 찔러넣었고, 교장이 덮었던 부활동 폭력 사건은 수면 위로 올라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동시에 피해 남매의 보호자가 가정폭력으로 신고되자 사건은 더욱더 불 지펴졌다.

 

“감독 처리는 막 끝났으니까. 가해자 처리와 전 주장 녀석과의 만남이 남은 건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청년의 호박색 눈동자가 모자 아래서 번득였다.

 

“폭력을 폭력으로 돌려줄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인적이 드문 공원, 반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입꼬리를 삐뚤이 말아 올렸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이런 사진을 지우지도 않고 낄낄거리며 돌려보는 개새끼들한테는 똑같은 개새끼가 되는 게 정답인 거 같더라고. 그렇지 않아?”

 

그는 키타가와 출신인 선배 둘, 오이카와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정말, 경멸스럽네.”

 

모자를 쓴 오이카와는 빠르게 보고 이와이즈미에게 핸드폰을 넘겨줬다. 그리고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동감이군.”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기질적인 이와이즈미의 시선에 벌거벗은 가해자들, 키타이치 3학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돌려서 말하지 않을게. 혹시라도 폰에 찍힌 사진 외에 따로 저장되어 있는 거 있으면 당장 지워. 만약에 단 하나라도 저런 사진이 다른데서 보인다면 이유 불문하고 너희들도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으으…….”

“난 한다면 하는 인간이거든. 부디 내가 이 추잡한 사진을 다시 보는 일이 없도록 처신 잘해야 할 거야.”

 

그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가해자들이 흐느끼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악귀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피해자가 당했던 굴욕적인 사진을 자신들에게 똑같이 찍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겠는가. 거기다 그 주변에는 그들의 선배들 및 다른 학교 운동부 사람들까지 내려다보고 있으니 두려움에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미야기가 넓다고 한들 학교는 한정되어 있고 자신들이 한 짓이 알음알음 소문을 타 어디를 가더라도 안 좋은 이미지가 박혀버린다면 고등학교 생활까지 끝장나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너희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선배로서 마지막 충고 하나 할게.”

 

그런 생각을 눈치 챈 듯 그가 나긋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아오바죠사이의 마츠카와가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져 발로 짓밟았다.

 

“앞으로 편안한 학교생활을 하고 싶다면 미야기를 떠나는 걸 추천할게. 너희 같은 쓰레기가 혹시라도 다른 학교에 가서 똑같은 짓을 일으킬까 봐 근처 배구부 사람들을 손수 데려왔거든. 겸사겸사 도움도 좀 받고 말이야. 참고로 네 또래인 녀석도 있으니까 재수 없게 같은 학교에 걸리면 3년 내내 같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

 

조각난 핸드폰을 남김없이 뒤꿈치로 잘근잘근 부스러트리는 소리 뒤로 그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오오토리 사쿠야의 말을 무시하고 지내다가 운 좋게 나랑 같은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면 기대해도 좋아. 아----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해 줄 테니까.”

 

죽고 싶을 만큼 말이야.

섬뜩하게 울리는 마츠카와의 마지막 말에 기어코 그들이 울다 못해 잘못을 빌며 무조건 전학 가겠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중 그 누구도 하쿠호 슈이치에 대한 폭력을 미안해하며 사과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을까?”

 

카라스노의 사와무라는 눈 돌아간 그의 협박이 끝나고, 질질 짜는 놈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면 스스로가 가해자라고 인정할 테니, 못할 거야.”

 

어른들끼리 암묵적으로 이번 일을 덮은 이상(다시 파헤쳐지긴 했지만), 가해자가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할 맹점을 이용한다는 말을 들은 아오바죠사이의 하나마키가 말했다.

 

“끝났네. 그딴 짓을 한 거 치고는 완전 쫄보였지만.”

“저런 놈들은 원래 뭉치면 지들이 강해지는 줄 알아서 그래. 멍청한 생각이지만.”

 

후타쿠치와 다테 공고의 카마사키가 말을 이어가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고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서로 제대로 인사를 안 한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모두, 도와줘서 고맙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되기 전에 청년, 사쿠야가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아까 전 야차 같이 화를 내던 사람과 같은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꽤나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후타쿠치가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자 그나마 안면이 있는 카마사키가 인사를 받았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 무엇보다 저런 새끼들이 내 후배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리니까 그냥 서로 그 뭐시기냐 상모거시기 한 걸로 치자.”

“상부상조겠죠 선배라면서 그것도 모르나….

“다 들리거든? 이 건방진 자식아!”

“윽, 무식하게 왜 때립니까!”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닐 텐데 익숙하게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사와무라가 하하 웃으며 외면했다.

 

“나도 때릴 걸 그랬다.”

“손을 더럽히는 건 나만으로 충분해. 와카토시.”

 

사쿠야는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의 축 쳐진 어깨를 토닥였다.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타치야마랑 시라토리자와는 현이 다르잖아.”

 

카라스노의 스가와라가 물었다.

 

“쥰페이 씨에게 같이 배구를 배웠다.”

“쥰페이 씨?”

“내 아버지야.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아버지의 제자였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엄마의 제자였거든. 덧붙여서 카마사키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야.”

 

전학가고도 꽤 연락을 했으니까.

 

“토비오짱?!”

“아. 그래서 알고 있던 건가.”

 

사쿠야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오이카와는 깜짝 놀랐고, 이와이즈미는 이해가 되었다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터 후배에게 악질적인 별칭이 붙었더라? 독재자라고. 혹시 들어봤니?’

‘귀엽지 않는 토비오짱에겐 그런 별칭이 붙어진 게 내가 맞을 이유가 되지 않아!’

‘키타이치에서 그 녀석이 겉돌고 있으니까. 현재 3학년들이 카게야마와 별다른 접점이 없음에도 그를 싫어하지. 눈치가 없다고, 천재라고. 그런데 포지션이 다른 전혀 위협도 되지 않는 후배를 그렇게 싫어할 수 있는 걸까? 같은 키타이치에 있는데도?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단체로. 단체가 그 한 명에게 열등감을 가졌다고? 집단은 공공의 적만 생기면 뭉치기 쉬워. 카게야마 토비오는 키타이치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언성이 높아지고 불화는 쌓여서 불명예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는 거야. 서론이 길어지면 입도 아프고 대충 눈치 챈 것 같으니. 간단히 말해줄게.’

‘…….’

‘키타이치 배구부의 천재혐오 시발점이 네 녀석이잖아. ……그래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운이 좋았어. 포지션이 전혀 겹치지 않는 세터였으니까. 근데! 내 막내 동생은! 슈이치는! 스파이커야! 이래도 네가 맞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토리짱~ 이제 뭐할 거야?”

“한 번 더 애칭으로 부르면 다른 쪽도 눈탱이 밤탱이도 만들어 주마.”

“힉!”

“이타치야마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 휴학할 거다. 동생들을 돌봐야하거든.

“그럼 이제 코트 위에서 널 보지 못하게 되는 건가?”

“3학년 전국 고교 종합 체육 대회(인터하이)랑 봄의 고교 밸리 전국 대회(봄고)에서 다시 볼 수 있어. 그때쯤 재활도 끝날 테고, 소란도 잠잠해질 테니까.”

 

사쿠야는 그들에게 작별 인사한 후 인적 드문 공원을 나섰다.

이틀 뒤, 프로 배구 스파이커 선수였던 고(故) 하쿠호 쥰페이(白 淳平)와 스포츠 뉴스 아나운서 및 연예인이었던 고(故) 오오토리 히마와리( 回日葵)가 집안 반대 때문에 법적 신고를 못하고 비밀 결혼식을 올린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둘의 슬픈 비극적 로맨스와 셋 쌍둥이의 연예계 은퇴 그리고 G중학교의 폭행 사건이 겹쳐지면서 미혼모 오오토리가(家) 4남매(오오토리 사쿠야( 咲也), 오오토리 카에데( 楓), 오오토리 쿠레나이( 紅), 오오토리 카오리( 香織))와 미혼부 하쿠호가(家) 쌍둥이 남매(하쿠호 유키나(白 雪菜), 하쿠호 슈이치(白 秀一))의 이름 또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6남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잠적했다.

 

 

tip.

세이죠 배구부가 강호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가 없는 주된 이유는 자칭타칭 인기인 오이카와 때문인데,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알량한 마음으로 지원했다가 인기인만 보느라 막상 일을 제대로 안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매니저는 팀 전체를 서포트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한 사람만 보고 견디기엔 일이 고되기도 했다. 결국 우르르 지원했다가 우르르 잘려나가거나 제풀에 관뒀고, 매번 등용하고 자라는 소모전을 하 바에 감독은 새로운 매니저를 받지 않기로 했다. 결국 잡무는 부원들이 나눠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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