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하는 학생들은 교문에 서 있는 금발머리 나이차 있는 남매(?)를 한 번씩 보고 지나쳐갔다. 


"쿄카 누나를 만나러 온 거야?"

"아니."

"에? 쿄카 누나가 아니라면 누굴 만나러 여기까지 온 건데?"

"익숙한 기운을 느꼈으니까."

"친우?"

"친우…라기에는 관계가 좀 애매모호한데. 나이차가 꽤 있으니까."


쿄코는 확실히 정의내리지 못하는 관계에 말끝을 흐렸다. 한참을 고민하고나서 관계에 정의를 내렸다.


"협력자라고 할 수 있겠네."

"협력자?"

"그래. 말솜씨가 청산유수라서 처세술이 좋았어."

"한 마디로 약삭빠른 남자였다는거로군."

"응. 정말 그랬어. 그래도 말야…, 도와달라고 청했을 땐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은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어."

"약삭빠르고 교활하지만 마지막에 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여우 요괴 후손답네."


쿄야의 신랄한 말에 쿄코는 겸쩍은 미소를 짓었다. 


"역시 착각이었나 봐."


그 기운을 느꼈는데 익숙했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갈-!"


돌아가려고 할 때 돌풍이 불어 벚꽃이 세차게 휘날리는 시야 속으로 가쿠란 교복을 입은 중학생 두 명이 들어왔다. 쿄코가 흡하고 숨을 들이키자 쿄야는 그녀가 본 방향을 유심히 보았다. 마사치카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남학생과 새까만 흑발과 푸른빛이 감도는 진보라색 눈동자의 남학생이 있었다. 저 둘 중 한 명이라는 소리인가? 마사치카 남동생은 아닐테니 자연스럽게 저 남학생이 되겠지만.


"카오루."


기억하고 있을까? 그때 기억이 그에게 있을까? 전생을 기억하는 건 죄니까 기대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기대를 해버린다. 그가 전생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츠치미카도 카오루(土御門 薫)란 명찰을 달고 있는 가쿠란 소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쿄코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그가 서서히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기억하지 못하면 그냥 지나갈 것이다.


"요코."

"요코(妖狐)?"


카오루는 지나가지 않았다. 멈춰서서는 진명까지 불렀다. 그건 그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야!"


쿄코는 그리움과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카오루는 쿄코의 머리를 쓰담았다. 쿄야를 비롯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기묘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두 사람은 애틋한 포옹을 나눴다.

키메츠 학원에서 멀지 않는 카페에서 세 사람은 차를 시며 앉아있었다. 쿄코는 카오루의 안부를 듣다가 그의 나이에서 깜짝 놀라워했다.


"중2학년? 그러니까 13살이라는 거지? 믿을 수 없어. 나보다 3살이나 어리다니!"

"미묘한 기분이네. 전생에선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래. 영감탱이었으니까."

"아니, 그 정도로 많지 않았어. 기꺼해야 2n살 정도?"

"그래. 30대 아저씨."

"닥쳐, 어른마냥 잘난척하는 꼬맹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담을 퍼붓었지만 서로를 보는 눈빛은 굉장히 상냥했다. 쿄야는 입술을 삐쭉내밀고 오렌지 주스를 홀짝였다.


"그 애는?"


카오루가 쿄야에 대해 물었다.


"아들."

"현생의? 그럴 리가 없나."

"전생의 아들이야."

"쿄카랑 같은 케이스인가."

"같지 않아. 쿄카랑 비슷한 거지. 이 아인 술사니까."

"헤~ 벌써 사역마랑 계약 완료한 거야? 어린 것이 대단하네."


카오루가 머리를 쓰담으려고 하자 쿄야는 고개를 홱 돌렸다. 잔뜩 심통이 난다는 아들에 쿄코는 당황했고, 카오루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카오루는 괜찮다는 손제스처를 취했다.


"기세 좋은 꼬맹이는 싫지 않거든. 이름은?"


카오루가 쿄야에게 질문을 던졌다. 쿄야는 쿄코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쿄야."

"난 카오루라고 해."


카오루는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서 흰 종이에 크게 한자 '馨'를 적었다.


"이렇게 적어서 카오루라고 읽어."

"진명?"

"나도 진명을 밝혀야지 셈셈인 것 같아서. 내 탓으로 네 엄마의 진명이 밝혀졌으니까 말이야."


그는 흰 종이에 '陽子'라고 한자를 쓰고 아래에 요미가나1를 적었다.


"혹시 당신…."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마, 이 남자가 쿄카의 생부인가. 엄마는 자신의 이름 '쿄'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생부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자식 이름을 짓으니까. 그럼 정말로 이 남자가…?! 쿄야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왠지 더 미움받는 것 같은데."

"…슬슬 본론을 꺼내들까."


카오루가 멋쩍음 얼굴을 하자 쿄코는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본론을 꺼냈다. 


"네 도움이 필요해, 카오루."

"뭐어어어어?!!"

"뭐야, 그 놀란 얼굴은."


너무 과장스럽게 놀란 표정을 짓는 카오루에 쿄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오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었다.


"네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좀 놀랐을 뿐이야."

"좀이 아니라 많이 놀란 것 같은데요."

"계속 시비구나."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요."

"쿄야."


그 이상은 말하지 말라듯이 쿄코는 엄한 목소리로 쿄야를 불렀다. 쿄코의 엄한 시선에 쿄야는 작은 목소리로 "죄송해요"라고 사과했다.


"확실히 엄마가 되었구나."

"뭘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


카오루는 쿄코의 모성 모습에 잔잔히 미소짓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더 내 협력자가 되어줘."

"…무슨 계획인데."

"쿠우겐을 죽일 계획."

"진짜냐."


쿄코의 말에 카오루는 충격받고 고개를 푹 숙였다.


"목숨을 걸어야겠지?"

"응."


당연한 소리를 묻는 구나, 아까부터.


"…생각 좀 해볼게."

"그렇게 해.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폰 번호를 교환하는 것으로 카페를 나와 카오루와 헤어졌다. 


"저 사람이 엄마에게 연락할까?"

"이어진 연은 사라지지 않아."


어떤 형태가 되었든 카오루와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시간이 늦었네. 돌아가자. 저녁 먹어야지."

"응."


쿄코와 쿄야는 서로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가게로 도착했을 때 마사히로도 귀가했는지 앞에서 딱 마주쳣다.


"외출하신 건가요?"

"응. 늦었네."

"아, 골목에서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다 보니까요."

"곤란한 사람?"

"백화점에서 만났던 쌍둥이 중 한 사람이요. 콘택트 렌즈를 떨어뜨렸다고 해서 함께 찾았어요."


아, 그때 보았던 자신감 부족한 쌍둥이 언니와 활발해보인 쌍둥이 동생인가. 세 사람은 대화를 계속하며 저택 복도를 걸어갔다.


"결국 못 찾았지만요."

"그렇겠지."

"렌즈가 워낙 작은 물건이니까요."

"그런 말이 아니야."

"에?"


쿄코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마사히로는 어리둥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찾았던 것이 아니라 찾을 수 없는 거야."

"찾기 전부터 찾을 수 없게 속박되어버린 거에요."


쿄야가 덧붙였다.


"속박?"

"그래.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여러가지에 속박되어 있어. 자연의 법칙에, 시간의 흐름에, 몸이라는 그릇에, 마음이라고 하는 자아에. 그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공통적인 족쇄. 그것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한 가지. 사람만이 사용하는 족쇄가 있어."

"그게 뭐죠?"

"말은 살아있는 거야."


그래. 말은 살아있는 거다. 진심이든 무의식이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생명을 얻어서 독처럼 송곳니처럼 마음을 후벼판다. 


""-언니!!""


쿄코는 쌍둥이들이 주방에서 고개를 쑤욱 내밀자 "다녀왔어"라고 인사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쌍둥이들은 마사히로의 뺨에 붙어진 흰 거즈에 대한 경과를 말해줬다.


"흐음. 그렇구나."


쿄코는 무건조한 목소리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언니. 유카리코 언니랑…."

"그 얘기는 꺼내지 마라고 했잖니, 시오리코."


유카리코 이름이 꺼내지자마자 쿄코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는 쿄코에 서러움을 느꼈는지 시오리코가 버럭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데! 그렇게 사이가 좋았는데! 너무 차갑잖아! 유카리코 언니도, 쿄코 언니도! "

"이건 당사자들끼리 문제야. 제3자는 끼어들지 마."


차갑게 단호히 말한 쿄코에 시오리코의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맺히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어차피 쿄코 언니가 잘못한 일이니까 무조건 유카리코 언니에게 사과해! 잘못을 저질렀으면서 사과하지 않는 건 최악이라고!!"


시오리코는 쿵쿵 발소리를 크게 내며 방을 튀쳐나갔고, 곤란한 얼굴인 나루코가 그 뒤를 쫓아 나갔다.


"무조건 엄마의 잘못만이 아닌데."


쿄코의 가슴에 비수를 박은 시오리코에 쿄야가 뇌까렸다.

  1. ≒후리가나 일본어 표기에서, 어떤 단어나 글자(보통 한자)의 읽는 법을 주위에 작게 써놓은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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